눈이 오면, 그들의 수고로움을 떠올립니다.

눈이 더이상 예쁘게만 보이지 않는 우리지만 그래도 눈을 예쁘게 바라볼 여유는 가져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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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미(yumi05)등록 2022.12.23 14:13
 

눈내리는 동네 거리 ⓒ 이유미

 
며칠 눈이 많이 왔다. 집 안에서 창문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눈은 아름답기만 하다. 그 풍경에 아이는 들뜬 목소리로 "야호 오늘 00이랑 눈싸움해야지" 라며 신나게 거실을 뛰어다닌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아이처럼 눈을 달갑게만 받아들일 수 없는 어른이 되었다. 행여나 남편의 출근길에 차가 미끄러질까, 등원 길에 아이들이 다칠까, 식당으로 걸어 출근하시는 시어머니가 너무 춥지 않으실까 노심초사한다. 그래서 눈오는 날 나의 머릿속은 이런 걱정들이 뭉쳐진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나도 아이처럼 눈오는 날이 마냥 신나기만 했던 그 시절이 있었다. 시골의 1층 주택에 살았던 어린시절, 눈 소식을 동네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눈온다" 외침으로 먼저 알았다. 그 소리에 우리 삼남매는 장갑도 없이 헐레벌떡 밖으로 뛰어나가, 눈을 뭉쳐 언덕길에 굴려 눈사람을 만들고, 동네 아이들과 눈싸움을 하며 눈밭에서 사정없이 굴러대며 깔깔 웃었다. 그렇게 신나게 한바탕 놀고 난 뒤, 물에 젖은 생쥐세마리꼴을 한 우리를 보며 엄마는 늘 얕게 한숨을 토해내셨다. 그땐 몰랐다. 엄마가 내뱉은 얕은 한숨의 의미를..
하지만 얼마 전 눈 오는 날, 친구와 한바탕 눈밭에서 구르고 들어온 아이를 보며 나는 그 시절의 엄마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눈이 녹아 축축히 젖은 외투와 신발. 해맑은 미소의 아이와는 달리 내 표정은 얼어붙고야 말았다. 외투와 신발에 묻은 눈을 털고 차례로 세탁하고 말리며 속으로 "눈이 그만와야 할텐데"간절히 되뇌었다.
맘카페에서 최근 재미있는 글을 본적이 있다. "하늘에서 예쁜 쓰레기가 내려요" 라는 한 엄마의 게시글. 다양한 답변이 달렸다. 눈으로 인해 출근길이 걱정되서 공감이라는 말이 대부분이었고, 간혹 그래도 눈은 예쁘잖아요. 잠시라도 즐겨보는 건 어떨까요? 라는 답변까지. 난 그댓글에서 아이들과 어른들이 눈을 대하는 온도가 다른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바로 눈에 대한 책임감의 차이. 눈이 오면 그 상황에 집중해 놀기만 해도 되는 아이들과 달리 어른들은 눈이 오면 평상시보다 출근길을 몇 배 더 긴장해야 하고, 여기저기서 눈을 치워야 하는 사람들의 수고도 상당하다. 어른들에게 눈은 즐김의 대상이 아니라 치워버려야 하는 책임의 대상인 것이다.
대학시절, 5살 터울의 남동생이 강원도 양구 최전방, GOP에 배치되어 군생활을 하게 되었다. 입대 후 한 달 즈음이었을까? 티비에서 강원도의 폭설경보 소식을 접한 엄마는 그 좋아하는 드라마도 마다하시고, 채널고정 후 한참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셨다. "00이가 눈치워야 할텐데 추워서 어떠카노" 그말과 함께 엄마의 눈에선 강줄기 같은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때마침 우리 집 창밖으로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 눈이 더 이상 예쁘게만 보이지 않았다. 문득 생각했다. 어렸을 적 장갑없이도 신나게 눈놀이를 했던 남동생도, 칼바람에 시린 손으로 그 눈들을 치우며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그 이후 고속도로 40분 거리의 직장생활을 시작한 내겐, 눈이 오는 날은 마치 귀신의 집을 통과하는 느낌이었다. 귀신처럼 언제 불쑥 튀어나올지 모를 빙판 구간, 브레이크에 기대에 미끌미끌 힘겹게 나아가는 차 안에서 뼛속까지 스며든 공포심마저 느꼈다. 하지만 사방에 나와 같은 운전자들이 있다는 사실에 이내 안도했다. 저들도 빙판길보다는 밥벌이가 더 무서운거다. 눈이 와도 생계를 위해 그것을 뚫고 나아가야 하는 우리의 현실...그래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눈을 더 이상 예쁘게만 바라볼 수 없는 슬픔을 마주하는 것이 아닐까?
눈이 와 평소보다 더 분주한 아침, 두 아이의 등원을 위해 버스를 타러 내려가는 계단에 두꺼운 천이 깔려있었다. 나는 그 천 덕분에 두 아이와 미끄럽지 않게 내려갈 수 있었다. 차를 기다리는 데 경비아저씨들이 열심히 제설작업을 하고 계신다. 덕분에 등원버스를 기다리며 서있는 곳은 하나도 미끄럽지 않았다. 버스를 태우며 생각했다. 그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나와서 이렇게 고생하고 계셨던 걸까? 누군가가 새벽같이 나와 깔아준 계단의 천, 패딩하나 안입고 열심히 눈을 치우던 경비아저씨들의 모습. 이것들은 당연한 수고로움이 아니었다. 이렇게 추위를 무릅쓴, 누군가의 힘든 노동에 기대어 편히 등원했다는 사실에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나는 이제 눈이 오는 날엔 예쁜 눈보다 누군가의 수고로움부터 떠올린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눈을 치우고 있을 군인들의 모습, 그리고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빙판길을 무릅쓰고 비장한 전사처럼 운전대를 잡거나 칼바람을 맞으며 빙판 위를 조심조심 걷고 있을 사람들, 또한 눈을 치워야 하는 의무로 추위를 무릅쓰고 새벽같이 제설작업에 힘쓰고 있을 사람들.. 그들이 있기에 우리는 그래도 눈을 예쁘게라도 바라볼 수 있는 것 아닐까?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눈이 오더라도 그들이 너무 힘들지 않게만 와주었으면 한다. 또한 그들의 눈에, 눈을 보며 하염없이 행복하기만 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렌즈를 씌워주고 싶다. 그 렌즈를 통해 눈을 바라보며 잠시라도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게 되기를...
덧붙이는 글 눈오는 날, 누군가의 수고로움도 떠올려보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길 바랍니다. 더불어 내리는 눈을 보며 잠시라도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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