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30 22:04최종 업데이트 22.12.30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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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취미로 레슬링을 즐기는 여성들의 모임에 들어갔다. ⓒ 박종혁


운동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글 쓰는 애'다. 생각이 많고 복잡하다. 글 쓰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운동하는 애'로 통한다. 무식하게 힘세고 단순하다. 한편 육아에 전념하는 또래들은 나에게 엄청난 체력과 운동능력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한다. 동시에 2006년생 레슬링부 신입에게는 몸 어딘가 고장 난 게 아닌지 의심스러운 사람이다. 

지난달에 취미로 레슬링을 즐기는 여성들의 모임에 들어갔다. 그전에는 레슬링에 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크로스핏이나 주짓수를 시작할 때처럼 이런 생소한 운동을 접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특히 레슬링이라는 건 엘리트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종목이라고만 생각했다.  


이처럼 일반 대중에게 레슬링은 매니악한 운동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그래플러(얽혀서 싸운다는 뜻의 유도, 레슬링, 주짓수 등의 종목을 즐기는 사람들)를 중심으로 붐이 일어날 조짐이 보기도 한다. 종합격투기(MMA)의 인기를 타고 주짓수가 큰 인기를 끌었듯 같은 이유로 레슬링도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이는 모두 레슬링 기술을 베이스로 활약하는 MMA 스타들 덕분이다.  

그러나 MMA에 크게 흥미가 없는 나로서는 앞서 언급한 두 운동, 크로스핏과 주짓수를 시작할 때처럼 단순히 친구 따라서 강남 간 셈이었다. 운동이 취미인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가만히 있어도 주변 친구들이 새로운 종목을 경험할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준다. 이들은 모두 자기가 하는 운동을 영업하는 데 진심이라서 되도록 많은 친구를 끌어들이고 싶어 한다. 그러니 주변에 이런 친구가 있으면 필요한 건 운동복과 약간의 호기심, 용기뿐이다.

실은 3~4년 전에도 레슬링을 체험한 적이 있는데 영화 <당갈>을 보고 감동한 직후였다. 비록 나에게는 주인공 기타와 바비타처럼, 자신의 좌절된 꿈을 대신 이뤄줄 딸을 훈련시킬 아빠는 없지만 힘이라면 여느 여성들에게 뒤지지 않으니까 얼마쯤은 힘으로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했다.

그러나 알음알음 찾아간 MMA 체육관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올 곳이 아닌데 잘못 찾아왔음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고작 대여섯 명 모인 와중에 옷이나 신발 등의 장비에서 느껴지는 소위 말하는 '짬빠'가 다들 레슬링을 배운 지 못해도 2~3년은 족히 된 듯했다. 흔히 말하는 '고인 물'의 대열에서 벗어난 사람은 MMA 코치와 나뿐이었다. '여기서 멀쩡하게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 시작하기도 전부터 진땀이 흘렀다.

그날의 수업은 체험이라고도 할 수 없는 시늉에 가까웠다. 하지만 레슬링의 매운맛만큼은 원 없이 맛본 시간이었다. 소감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레슬링은 상당히 원초적이다. 주짓수와 비교하면 주짓수는 도복이라도 입어서 라펠(도복 상의의 깃이 접히는 부분), 소매, 바지, 벨트 등을 이용해 상대를 붙잡을 수 있다.

그러나 개그쇼에서 소재가 되곤 하는, 몸에 완벽하게 밀착되는 레슬링 복장을 보면 알 수 있듯 레슬링은 붙잡을 곳이 전혀 없다. 그리고 주짓수는 바닥에 등을 대고 싸우는 그라운드 기술 위주인데 레슬링은 서 있는 상대를 넘어뜨려 그라운드로 끌고 가기 때문에 날 것 그대로의 매력이 살아 있는 종목이다.

그리고 힘을 쓰는 원리만 봐도 이 운동이 몹시 드세다. 무슨 기술을 쓰든 간에 이른바 '파워존'이라고 불리는 고관절, 복부, 허벅지로 구성된 몸의 중심부, 인체의 모든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힘의 원천인 이 부위를 꼿꼿이 세우고 상대의 체중을 버텨야 한다. 또 특별히 목 주변의 근력을 키워야 할 정도로 목을 다양하게 많이 쓴다. 

나는 이 모든 걸 몸으로 깨우쳤다. 단순히 레슬링 기본 동작 몇 개를 따라 하는 시늉만 했음에도 몸 어느 부위의 힘을 얼마나 썼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목을 시작으로 몸통, 허리 관절이 전부 끊어져 다시는 상체를 펴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중요한 건 영원한 생동감
 

나의 아이돌 윤소영 코치(오른쪽) ⓒ 박종혁


고통뿐인 수업이었지만 한 가지 큰 수확이 있었다. 바로 그곳에서 나의 아이돌 윤소영 코치를 만났다는 거다. 윤소영 코치는 국가대표 레슬링 선수 출신으로 지금은 레슬링을 생활체육으로 저변을 넓히는 데 앞장서고 있다. 여성 레슬링 합동 모임을 결성한 장본인이 윤소영 코치다. 

인천 문학 레슬링 경기장에서 몇 년 만에 만난 윤소영 코치가 예의 그 귀여운 덧니를 내보이며 활짝 웃었다. "근데 젊은 여자들은 젊어서 한다지만…." 걱정스러운 눈빛에서 이번에도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초보자에게도 열린 모임이긴 하나 나는 모임의 가장 연장자이면서 레슬링 경험이 가장 일천한 최약체에 속했다. 다른 구성원들의 면면은 비교도 할 수 없이 화려했다. 전현직 레슬링 선수, 크로스핏 국가 대표, MMA 선수, 주짓수 선수….

한눈에 보기에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센 여자들을 다 모은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레슬링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물구나무선 채로 양팔 걷기, 줄타기처럼 묘기에 가까운 동작을 몸풀기로 가볍게 해내는 모습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세상은 상대적인 거라지만 허약한 친구들 앞에서 '힘세고 운동깨나 하는 애'로 통했던 나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러나 열의만 있다면 햇병아리도 안고 간다는 윤소영 코치의 말을 무조건 믿기로 했다. 또 무엇보다 여성들끼리 모여서 레슬링을 할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 거의 유일무이한 그 모임이 좋았다. 그곳에서 우리는 남자의 방해나 가르침 없이 오직 우리끼리 배우고 격려하고 즐긴다. 

지난달에는 <노는언니2>도 출연한 바 있는, 우리 사이에서는 연예인이나 다름없는 윤소영 코치를 만나기 위해 한 고등학교 레슬링부 신입인 2006년생 여성들이 찾아왔다. 레슬링을 배운 지 이제 6개월째라는 얼굴에 솜털이 가득한 그들에게 나는 기본 동작과 태클 몇 가지를 배웠다.

그리고 내가 초심자로 새로운 운동을 접하는 걸 얼마나 좋아했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관련된 정보를 하나씩 습득하고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을 하고 별것 아닌 기술을 하나 해냈다고 기뻐하는, 초보라서 가능하고 초보라서 용서되는, 못해서 더 재미있는 완벽한 초보. 

이런 순간에 내 삶의 모토인 '중요한 건 영원한 삶이 아니라 영원한 생동감'이라는 잠언이 재현된다. 니체는 평생 운동이라고는 하지 않았는데 내가 깨지고 다치고 넘어지면서 배운 비밀을 어떻게 알았나 몰라.
덧붙이는 글 브런치에도 게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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