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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보 아닌 정권안보에 관심 있었던 정권의 말로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안보를 유별나게 강조했던 박정희 정권 사례로 본 무인기 사태

등록 2023.01.06 11:02수정 2023.01.06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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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북한 무인기 영공 침범과 관련된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 연합뉴스

 
안보를 외치는 정권이 반드시 안보를 잘하는 정권은 아니라는 점은 안보를 유별나게 강조했던 박정희 정권의 사례에서도 나타난다.

박 정권은 국민들의 귀가 닳을 정도로 국가안보를 역설했다. 일례로, 1975년 5월 22일에는 최전방 2개 부대를 시찰하는 자리에서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해서는 휴전선을 철통같이 지키고 공산군이 오판에 의해 무력침략을 해올 경우 이를 즉각 섬멸시키는 데 있다"(23일자 <조선일보> 기사)라고 강조했다.

안보를 강조하는 빈도가 높았다는 점은 그달 7일 열린 정부·여당·청와대 연석회의 발언에서도 알 수 있다. 8일 발행된 <매일경제> 1면 좌상단에 따르면, 그는 "북괴가 무모하게 공격을 가해올 경우 이를 충분히 섬멸할 자신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런 모습은 베트남전쟁(월남전)이 격화됐을 때인 1968년 상반기 풍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해 4월 1일 향토예비군 창설식 때 그는 북한을 겨냥해 '적'이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사용하면서 "내 나라 내 고장은 내 힘으로 방위하겠다는 결의와 각오를 가다듬어야 할 것", "우리의 모든 힘을 동원, 조직화하고 투철한 승공의 신념에 의해 범국민적인 자주방위의 힘으로 묶을 때 우리를 노리는 적의 침략 야욕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 것"(1일자 <동아일보> 1면)이라고 역설했다.

66년, 67년, 68년, 69년에 드러난 안보상의 허점

'섬멸' 같은 자신감 넘치는 표현을 써가며 안보를 강조하고 온 나라를 긴장시킨 그였다. 하지만, 무장공비에 대한 공포심이 일상화됐던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그는 안보상의 허점을 많이 드러냈다.

일례로, 1966년 5월 17일에는 남부 지방인 진주 덕이마을에 무장공비가 침투했고, 1967년 9월 13일에는 중부지방에서 경의선 열차가 폭파됐다. 1968년에는 김신조 사건으로 유명한 1·21 사태가 있었고, 11월 2일의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있었다. 5개월 뒤인 1969년 3월 16일에는 울진·삼척 북쪽의 주문진에 무장공비가 침투했다.


1970년 6월 22일자 <동아일보> '서울에 무장공비 출현'에 따르면, 이날 새벽에는 무장공비들이 국립묘지(국립서울현충원) 현충문을 폭파하려다 실패했다. 이듬해 1월 23일에는 북한 요원들이 대한항공 F-27를 납치하려다가 미수로 끝났다. 1974년 6월 28일에는 해군 863경비정이 격침됐다. 다음날 <매일경제> 7면 좌상단은 "북괴가 이와 같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각종 해상 도발행위를 자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안보 위기가 육상·해상·공중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1974년 11월 5일에는 제1호 땅굴이 발견됐다. 안보가 전 방위적으로 뚫려 있었던 것이다.

2014년에 <군사> 제91호에 수록된 이윤규 국방대학교 교수의 논문 '북한의 도발 사례 분석'에 따르면, 박정희가 집권한 1961년부터 10년간 북한의 대남 침투는 총 933회였다. 투입된 요원은 2693명이었다. 집권 후반기인 1970년대에는 대남 침투 횟수가 190건이었다. 횟수는 적어졌지만, 해마다 2회 정도는 남한 방어망이 뚫린 셈이다.

박 정권이 안보를 허술히 다뤘다는 점은 대통령관저 부근까지 뚫린 1968년 1·21 사건에서 상징적으로 표상된다. 이 사건을 일으킨 민족보위성 정찰국 124군부대 무장요원 31명은 사흘 전인 18일 자정에 군사분계선을 통과한 뒤 19일 저녁 8시 30분경 임진강 얼음판을 태연하게 도강했다. 그런 뒤 20일 밤 10시경 청와대 인근인 자하문(창의문) 초소에 출현했다.

자하문과 청와대의 직선 거리는 1킬로미터 정도다.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청와대 코앞까지 왔으니, 박 정권의 안보 역량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경찰 병력이 출동한 것은 이들이 "우리는 방첩대원들이다", "신분증은 볼 필요가 없다", "우리 부대로 가자"며 다소 허세스런 위협을 가하며 초소를 통과하고 나서 400미터쯤 걸어갔을 때였다. 1명 생포, 28명 사살, 2명 도주로 끝난 이 사건은 휴전선은커녕 대통령관저 방어선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박 정권의 안보 무능을 드러낸다.

그달 23일자 <경향신문> 2면 좌상단에 따르면, 국군과 경찰은 "북괴 유격대에게 붙들려 석방된 나무꾼 4명의 신고를 받고" 19일 밤부터 이들을 수색했다. 그랬는데도 북한 유격대가 대통령관저 근처까지 여유 있게 침투했던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합심해서 난국을 타파해야"

이 시기는 베트남전쟁이 벌어질 때였다. 박 정권이 강조하는 반공 이념을 앞세워 미국이 전쟁에 뛰어든 뒤였다. 한국 역시 군대를 파견한 뒤였다. 그래서 안보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할 때인데도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위 <경향신문> 기사는 "북괴 유격대의 서울 침입 경로는 휴전선 방어와 서울 외곽지구 경비태세에 중대한 문제점을 던지게 한다"라며 우려를 표했다.

상황이 그 정도였기 때문에 야당은 관계 장관들의 문책을 추진했다. 그달 23일자 <동아일보> '관계 장관 인책 요구키로'는 신민당 긴급 회의 소식을 전하면서 "이날 의원총회는 유격대가 수도 서울 중심권에까지 침투해 들어와 교전한 사건의 중대성을 감안, 우선 정일권 총리와 이호 내무, 김성은 국방장관 등을 상대로 2, 3일간 진상규명을 위한 대정부질의를 한 후 최소한 내무·국방 두 장관과 중앙정보부장 등의 인책을 요구키로 방침을 세웠다"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문책 인사에 대해서마저 소극적이었다. 야당의 공격을 받은 총리와 장관들이 사의를 표명했지만, 그해 2월 1일자 <경향신문> 2면 좌하단에 따르면 "이런 어려운 때일수록 합심해서 난국을 타파해야 한다"라며 "사표 냈다는 얘기는 아예 입밖에 내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고 꾸중을 했다고 한다.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 내에도 문책 필요성이 제기되던 당시 상황은 한 달여 만의 전격 인사로 마무리 국면에 들어갔다. 2월 23일자 <동아일보> '1·21사태의 전격 인사'는 "22일 오후에 있은 내무부차관을 비롯한 일부 도지사와 치안 책임자에 대한 정부의 경질 발령은 예고 없는 전격적 인사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정도 선에서 끝날 일은 아니었다. 박정희는 결국 27일 김성은 국방부장관을 경질했다. 국회 본회의에서 국방·내무 해임건의안이 표결되기 전날의 일이었다. 국방부장관 해임을 관철시킨 야당은 내무부장관 해임건의안을 스스로 철회했다.

민주화세력에 대한 비판 끼워넣은 박정희

박 정권이 안보를 외치면서도 안보 무능을 노출한 것은 그들이 중시한 안보가 국가안보보다는 정권안보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박 정권은 1969년 3선 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의 길을 열고 1972년 유신체제 선포로 사실상의 종신 군주제를 가능케 했다.

또 외부가 아닌 내부의 반대세력을 겨냥해 아홉 차례나 긴급조치를 발포했다. 그리고 군대와 경찰을 국민과 민주화세력 탄압에 활용했다. 총과 대포를 내부로 겨누고 있었으니, 외부로부터의 안보는 그만큼 소홀히 다룰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가 국가안보에 집중하지 못했다는 점은 국가안보를 역설하는 그 와중에도 다른 데에 신경을 쓴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위에서 소개한 1975년 5월 22일의 최전방 부대 방문 때도 그랬다.

"섬멸"을 운운하며 안보를 강조하던 박정희는 발언 도중에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도리어 후방에서 시국을 잘 모르는 일부 계층을 선동해서 국민총화를 와해시키려 기도"해왔다면서 민주화세력에 대한 비판을 끼워넣었다.

그런 끼워넣기가 어쩌다 한 번 있었던 게 아니라는 점은 위에 소개된 그달 7일의 연석회의에서도 나타났다. 이날도 박정희는 발언 도중에 북한과 김일성이 아닌 "배웠다는 사람들"에게 화살을 돌렸다. 위에 언급된 그달 8일자 <매일경제>는 이렇게 보도했다.

"박 대통령은 '지금 전방의 군의 사기는 높으며 모든 국민들의 사기도 또한 높아야 하는데, 일부 배웠다는 사람들이 공연히 엉뚱한 소리를 하려 해서 탈이다'고 지적, '이들이 엉뚱한 소리를 계속한다면 북괴가 이를 오판의 근거로 삼아 적화야욕을 달성하게끔 만드는 것이 가장 위험한 만큼 시국에 역행하는 잡음을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정희 정권의 사례는 안보를 외치는 정권이 반드시 안보를 잘하는 정권이 아님을 보여준다. 안보를 잘하려면 안보에 집중하는 자세부터 가져야 하는데, 박 정권은 그러지 못했다. 그들이 주된 관심은 민주화세력의 동향에 가 있었다. 진짜 관심은 국가안보가 아니라 정권안보였다.
#북한 무인기 #윤석열 정권 #안보 #9.19남북군사합의 #반공 콤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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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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