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20 11:10최종 업데이트 23.03.20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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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까래가 모이는 원통을 받침대 위에 올린 모습, 각목으로 움직이지 않게 고정돼 있다. ⓒ 노일영

 
남편과 나의 불화·반목·갈등을 토대로 만들어진, 막장 드라마나 다름없는 흙벽은 간신히 완성됐고, 남편은 24개의 서까래와 서까래가 모이는 원통도 모두 만들었다. 이제 흙벽 위에다 서까래를 거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흙집이 원형이다 보니 서까래를 거는 게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남편이 읽은 흙집 관련 책이 아무리 상세하게 시공 방법을 설명한다고 해도, 책만 읽고 직접 흙집을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흙벽을 쌓는 것은 우리 둘의 몸을 갈아 넣어서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었지만, 나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 시작되자 남편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남편은 집 짓는 현장에서 책을 펼치고 서까래와 관련된 부분을 몇 번이나 읽었는데, 고개만 저으며 책에 도돌이표라도 찍힌 것처럼 그 부분만 반복해서 거듭 책장을 넘겼다. 하지만 건축이나 흙집에 관한 기본적인 배경지식이 없는 남편에게 책이 답을 줄 수는 없었다. 책에 적히지 않은 공백들이 남편을 괴롭히는 듯했다.

"뭐 해? 진도 안 나가? 기술이 없어서 못 하겠으면, 포기하고 흙벽 위에다 지붕 대신 그냥 비닐이나 가빠, 거적때기 같은 거로 덮으면 되겠네."

남편이 흙벽만 덩그러니 세운 채 흙집 짓기를 그만두지 않을까 속으로 걱정했지만, 일부러 독하게 말을 뱉었다. 이 남자는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옆에서 같이 걱정하고 위로해 주면 안 된다. 그냥 막 강하게 밀어붙이고 조롱도 섞어 줘야 제정신을 차린다. 그게 이 남자를 조련하는 방법이다.

"아니, 진도만 막 치고 나간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이제부터는 좀 고민을 해서 정교하게 작업을 하려고 뜸을 들이는 거지, 기술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라고."

남편이 반복해서 읽고 있는 책을 빼앗아 서까래와 관련된 내용을 한번 훑어봤다. 24개의 서까래 끝을 원통 안에 판 홈에다 집어넣어야 한다. 그러면 원이 360도 이고, 360도 ÷ 서까래 24개=15도 아닌가.

'아니, 무슨 굉장히 어려운 기술적 난관에 직면한 줄 알았더니만, 이깟 산수 문제였다고?'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책에는 이 내용도 모두 적혀 있었는데, 남편은 이해를 못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더 강하게 밀어붙이면 남편은 저기 멀리 읍내 술집으로 튕겨 나갈 것이다. 조련사의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도면
 

남편이 부끄러움을 덮기 위해 손으로 그린 서까래 도면 ⓒ 노일영


"그래, 책을 읽어 보니 여러 가지 고민이 많았겠네. 당신은 문과, 나는 이과 출신이잖아. 이렇게 어려운 수리영역 문제는 내게 한번 맡겨 보라고, 알겠지? 일단 서까래 16개의 끝을 정확히 15도로 깎고, 나머지 8개는 깎지 말고 그냥 놔두라고. 깎은 서까래 16개를 홈에다 고정시키고 나서, 남아 있는 빈 공간의 각도를 재고 그 수치만큼 서까래를 깎으면 될 것 같아. 분명 오차가 있을 거니까, 남은 8개 서까래의 각은 14도가 되거나 17도가 될 수도 있겠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지?"

나름의 해답을 제시했는데도 내 예상대로 남편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불시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얼떨떨하고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남편은 분명 속으로 부끄러워하면서 이 부끄러움을 덮어 버릴 이슈를 찾고 있거나, 부끄러움을 순식간에 날려 버릴 수 있는 물타기 방법을 강구하고 있을 것이다.

"일단은 도면으로 서까래들을 한번 그려 봐야겠어. 한옥학교에서 손으로 도면을 그리는 방법을 배웠으니까. 내가 한옥학교 출신이잖아."

도면을 그릴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건 시간 낭비였다. 서까래의 끝을 15도로 깎으면 되는데 도면이 왜 필요한가?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남편은 한옥학교 출신이 아니라, 자퇴생이지 않은가. '산수 때문에 쪽팔려서 도면이 필요하겠지. 그래, 옜다, 도면 한번 그려라!'

남편은 도화지 위에다 1/2 정도의 축척으로 자와 각도기, 컴퍼스를 이용해 도면을 그렸다. 원형의 1/4만 그린 도면에서 각각의 서까래 끝은 정확히 15도로 나누어졌다. 남편은 뭔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음, 당신 말이 맞네. 서까래를 15도로 깎으면 되겠구만. 어때 내가 손으로 그린 도면 멋지지?"

360÷24=15라는 산수는 굳이 도면으로 확인할 필요가 없다. 도면을 그린다고 360÷24의 답이 17이나 18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손으로 그린 도면 한 장으로 남편이 자존심을 되찾고 삶의 활력을 얻었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우와, 진짜 도면 잘 그린다! 멋지네."

낮술
 

남편이 서까래의 끝을 15도로 깎기 위해 만든 마분지 틀 ⓒ 노일영


어쨌든 남편이 서까래의 끝을 깎기 전에 마분지로 모양 틀을 하나 만든 것은 칭찬 받을 만했다. 남편은 그 마분지 틀을 16개의 서까래 위에다 대고 선을 그어 각을 표시했다. 일머리라고는 전혀 없는 남편이라 솔직히 좀 놀랐다.

"이야, 도면보다 이게 더 멋진데, 우리 남편 대단해!"
"아, 이거. 이거는 뭐 한옥학교에서 이런 방식으로 하더라고."


'그래, 그러면 그렇지.' 하지만 모양 틀을 기억해 내고 활용한 것만 해도, 내 기준으로 남편의 일머리는 일취월장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남편의 일머리에 대한 기대치는 높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어 놓은 선에 맞춰 전동대패로 서까래를 깎는 작업도 내 눈에는 그리 만만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전동대패의 대팻날이 돌아가는 소리만 들어도 나는 무서울 지경이었는데, 남편은 쉬지도 않고 전동대패를 밀어 댔다. 역시 남편은 단순 반복적인 작업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원통을 고정대 위에 올리고, 서까래를 걸기 전에 각목 하나를 흙벽 위에 올려 봤다. ⓒ 노일영

 
이제 서까래가 모이는 원통을 흙벽의 높이보다 40cm 정도 높게 집의 중심에다 세우는 작업을 할 차례였다. 남편이 받침대를 만들고, 그 위에다 원통을 올리고 못을 박았다. 그리곤 내게 그 받침대를 들고 있으라고 명령했다.

남편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원통 받침대가 흔들리지 않도록, 문틀·창틀이 연결되게 지지대를 대고 못을 박아 받침대를 고정시켰다. 그리고 줄자를 대고 각 방향에서 반지름을 쟀는데, 치수가 동일하지 않았다. 그건 원통 받침대가 중심에 놓이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남편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원통 받침대를 도대체 어떻게 잡고 있었길래 반지름이 이따위로 제각각이냐고!"

역시 혼자서 먹는 낮술은 최고였다. 더구나 짬뽕이 안주라서 소주는 달콤하기까지 했다. 이번에는 남편을 흙집 시공 현장에다 버려두고 나 혼자서 읍내 술집으로 내려왔다. 마을로 올라갈 땐 동네 아재를 부를 생각이었다.
덧붙이는 글 <함양타임즈>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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