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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바다의 낭만... 아니었다, 이것은 공포

겨울 바다와 조개구이 그리고 고소공포증 환자의 스카이 바이크

등록 2023.01.18 13:37수정 2023.01.18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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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트인 수평선과 한가롭게 노니는 갈매기, 그리고 인어공주의 잔상을 남기고 사라지는 파도까지. 바다는 원래 겨울에 가는 곳이다. 수영하러 가는 곳이 아니다. 수영은 수영장에서 하는 거다. 적어도 165살의 세 동거인에게는 그러하다. 물장구치고 모래놀이 하던 시절이 이제는 전생처럼 느껴지는 나이다. 바닷물에 들어갈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만 같은 우리가, 바다로 향한 까닭은 단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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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겨울바다 겨울바다라는 노래는 있어도, 여름바다라는 노래는 없으므로, 바다는 겨울바다가 으뜸이다. ⓒ 이정혁

 
바다 보고, 조개구이나 먹고 오자. 시작은 소박하였으나, 결과는 심히 창대하리만큼 두려웠던, 그날의 시작이다. 조개구이를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엄마. 충분히 이해하고 수긍한다. 세상에는 반찬과 안주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요리들이 무수히 많다. 생선회도 사실 초밥으로 만들어 먹으면 한 끼 식사로 훌륭하지 않은가.


하지만, 조개구이는? 조개구이랑 밥만 먹는 사람을 나는 여태껏 본 적이 없다. 자체가 안주로 태어난 숙명. 엄마가 조개구이를 맛보지 못했던 결정적 이유다. 파도가 밀려왔다 사라지는 해변을 거닐며, 그동안 살아왔던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는 가족의 모습은, 우리의 페이지에 없다.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스카이 바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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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 해수욕장 겨울바다를 보고 싶어 달려간 대천 해수욕장 ⓒ 이정혁

 
무릎 아픈 엄마에게 모래사장 걷기는, 모래주머니 차고 평지를 달리는 것과 진배없다. 엄마는 등대처럼 멀리서 바다를 바라보고, 나이를 거꾸로 먹는 중인 나만 혼자 모래 위에 글씨를 새기며 놀다가 바로 조개를 먹으러 간다.

이 글의 주 내용은 아쉽게도 조개구이가 아니다. 할 말은 많으나, 주메뉴를 위해 고이 접어둔다. 조개구이를 다 먹고, 남은 조개를 싸달라 해서 밖으로 나오니 뭔가 아쉽다. 두 시간이나 차 타고 와서 그냥 갈 수 없잖아? 주변 가볼 만한 곳을 검색하던 중, 눈에 딱 띄는 곳이 있다. 운명의 존재를 믿는 편이다. 스카이바이크는 그렇게 우리에게 화살처럼 날아왔다,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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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 조개구이 조개구이를 한 번도 드셔보지 못한 엄마를 위해 특대를 주문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조개구이와 밥만 먹어보았다. 역시, 술없는 조개구이는 감흥이 떨어진다. ⓒ 이정혁

 
아이들이 어렸을 때, 문경이나 정동진에서 레일바이크를 탄 적이 있다. 온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허벅지가 터질 뻔했던 아픈 기억이 있지만, 바다라는 매혹적인 풍경을 보며 자전거를 탄다는 것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믿는 구석인 동생도 있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바이크'라는 단어의 지배를 받느라 '스카이'를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하늘이 잘 보이는구나, 정도.

오후 매표는 2시에 시작된다. 평일 낮에 무슨 사람이 있겠어? 라는 기대는 요즘 거의 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이미 중장년 백수의 시대로 넘어갔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허를 찔린다. 매표소 앞을 메운 인파는 방학을 맞은 학생들이다.

10여 분을 기다려, 표를 구매하려는데, 뭔가 특이한 조건이 있다. 만 65세 이상의 노약자와 초등학생 이하의 어린이나 장애인은 반드시 성인 보호자 2명과 함께 탑승해야 한다는 점이다.


엄마랑 단 둘이 왔으면, 탑승 불가다. 새삼 동생의 존재감이 부각 되며,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되었건 탄다. 탑승의 필요조건을 충족한 쾌감 때문인지, 긴 대기 줄 때문이었는지, 그 순간만큼은 다른 주의 사항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침내 탑승 차례가 되었다. 제일 먼저 바이크에 올라타려는데, 안내자가 제지한다.

"어르신께서 안쪽으로 타시는 게 좋겠습니다. 안쪽이 덜 무섭거든요."
"엄마가 저희보다 놀이 기구 잘 타요."


두 형제는 날름 안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엄마는 부처의 표정으로 덤덤하게 내 오른쪽에 앉았다. 세상이 무너져도 끄떡없다는 칠십 인생의 내공이 그대로 드러나는 위엄이다. 근데, 자전거가 왜 무서운 거지?

으악! 떨어진다! 브레이크!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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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 스카이바이크 풍경-1 왼쪽 자리에 앉아 직선 코스를 천천히 달리면 그나마 살만하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분이라면. ⓒ 이정혁

 
4인승 바이크가 서서히 출발하고, 오르막 구간을 안간힘을 써서 오르고 나서 두 가지를 깨달았다. 하나는 오르막길은 전동 구간이라서 페달을 구를 필요가 없다는 것, 그리도 또 하나는 약간의 회전 구간에서도 바이크가 덜컹거린다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고소공포증 환자에게는 그 미세한 움직임조차도 쓰나미와 맞먹는 공포로 다가온다. 머릿속이 추락을 상상하며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왕복 2.3km의 구간에 40분이라는 시간 동안 꼼짝없이 묶이게 된 것이다. 고소공포증 환자를 공중에 매달아 놓은 셈이다. 그나마 직선 구간은 견딜만 했다. 약간의 회전 구간만 나오면 바이크는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듯 기우뚱한다. 나는 고비마다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으악! 떨어진다! 브레이크!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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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 스카이바이크 풍경-2 고소공포증 환자는 가급적 타지 않는 것이 좋고, 만약 타게 되더라도 반드시 왼쪽 자리에 탑승하시길. ⓒ 이정혁

 
모르는 사람이 보면, 웬 호들갑이냐 하겠지만, 고소공포증 환자는 진심이다. 손바닥과 등에 땀이 흥건히 맺힌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공포와 허탈은 충분히 공존이 가능한 감정이다. 비명과 그에 따른 멋쩍은 웃음이 수없이 교차하는 상황. 내릴 때가 다 되어 엄마는 내게 한 마디 했다.

"니가 하도 소리를 질러대서 진짜 떨어지는 줄 알고, 엄마도 무섭드라. 오른쪽 자리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절벽이여. 앞으로는 이런 거 타지 마라. 옆 사람 피해 주지 말고."

순간 나는, 엄마가 느꼈을 공포보다, 안쪽 자리에 타길 천만다행이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용쓰느라 아련한 왼쪽 팔의 근육통과 함께. 엄마는 패러글라이딩보다 몇 배 무서웠다고 했다. 바로 나 때문에. 문득, 공포를 증폭시켜주는 동승자 아르바이트가 떠올랐으나, 두 번 다시는 못 타지 싶어 고개를 저었다.

바다와 조개와 고소공포증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내게 대천해수욕장은 귀신의 집보다 더한 공포를 느꼈던, 뼈아픈 기억의 장소로 남을 것이다. 출구에서 내려 조금은 한산해진 매표소 앞을 지나는데,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문구가 그제야 눈에 띈다.

'음주자, 임산부, 고소공포증이 있으신 분...(중략)은 탑승이 제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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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 스카이바이크 매표소 탑승권 발권 전에 반드시 안내문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 이정혁

 
저런 거는 표 살 때 한 번 더 알려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손아귀에 힘을 주어 2만 6천 원짜리 3인용 입장권 영수증에 대고 분풀이를 했다. 하늘 좋고, 바다 좋은, 조개구이집 사장님의 인심까지 완벽하게 좋았던, 어쩐지 포근한 겨울날의 어이없는 이야기다.
#대천해수욕장 #스카이바이크 #엄마랑놀기프로젝트 #고소공포증 #조개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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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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