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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민 1.5세대 작가가 쓴 한국 민중 소설

김주혜의 <작은 땅의 야수들>을 읽고

등록 2023.01.18 16:39수정 2023.01.18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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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호랑이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다.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졌고 호랑이가 많이 서식하여 '호랑이 나라'라고 불렸다. 자연스럽게 우리 민족은 호랑이를 성스러운 동물로 인식하고 숭배했다. 건국 신화에 등장하고 올림픽대회 마스코트로 선정되기도 했다. 

일제 시대 때 일본이 호랑이를 멸종시켰던 이유가 호랑이의 기개를 타고 난 우리 민족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호랑이답게 우리 민족은 그 참혹했던 시기를 견디고 살아남았다. 최근에 이 호랑이 이야기로 시작한 역사 소설이 출간되어 큰 관심을 얻고 있다. 김주혜 작가의 장편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다산북스, 2022)은 1918년 평안도에 사는 호랑이 사냥꾼 '남경수'로부터 시작하여 1964년 제주도 해녀까지 격동의 세월을 살아냈던 민중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민 1.5세대 작가의 첫 장편소설

김주혜 작가는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 1.5세대 작가이다. 독립운동가였던 외할버지의 영향과 조국의 문화와 언어를 잊지 않는 배경에서 자랐다. 그녀는 2016년 단편 '보디랭귀지'를 시작으로 영미의 다수 유명 문예지에 감각적인 단편들을 기고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2021년에 출간된 <작은 땅의 야수들>은 그녀의 첫 장편소설이다. 미국의 여러 매체에서 '2021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고, 2022년 9월에는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문학 작품에 수여하는 '데이턴문학평화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작가는 "지금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작은 땅에서 살았던 한국인들에 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인류 전체의 인간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작은 땅의 야수들>을 썼다고 한다. 

소설에는 기생 '옥희'를 중심으로 남경수의 아들 '정호'와 양반 출신의 가난한 고학생 '한철', 지주 가문의 외아들 '성수', 독립 운동가 '명보' 등이 등장한다. 옥희는 경성의 명월관에서 일하면서 정호와 우정을 나누고 한철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기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한철과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옥희의 사랑을 받지 못한 정호는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떠나게 된다. 한편, 명보와 성수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시각 차이로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해방 이후 휘몰아치는 정세 속에서 주인공들의 삶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작가는 역사의 주체는 바로 민중이라고 이야기한다. 주류 역사는 크고 굵직한 역할을 했던 남성들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가난하고 천한 대우를 받았던 사람들도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대의를 위해 행동했다. 군자금을 마련하고 3.1운동 시위에도 참여했던 기생들의 모습이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편지를 전달했던 정호의 역할도 중요한 일이었다. 기생 '은실'은 "이 군자금은 단지 저만이 아니라 거의 평양 전체 기생들이 한 푼 두 푼 모아서 드리는 것임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75쪽)라며 독립자금을 건넨다. 

소설은 절박한 삶의 순간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 질문한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에 헌신한 명보와 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정치는 자네 같은 정치인들의 몫"(131쪽)이라며 자신의 사업에 집중한 성수와 같은 사람도 있다. 포악했던 제국주의 시절에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가난하든 부자이든 각자의 자리에서 '선택'한 삶은 생존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생존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모든 선택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선악의 기준으로만 그들의 선택과 결과를 판단하기는 무리이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오롯이 본인의 몫이다. 

민중의 삶을 생동감 넘치게 담아낸 소설 

혼란스러운 역사적 현장 속에서도 인간의 욕망을 이야기한 것이 인상적이다. 소설의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모습이다. 옥희는 절친인 연화와 재능 경쟁을 해야 했고 한철은 신분 상승을 위해 사랑하는 옥희를 배신한다. 성수는 성공을 위해 민족을 저버리는 친일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정호가 독립운동을 했던 주된 이유 중에는 옥희와 명보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작가는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채임과 대의 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욕망과 인간적 감정을 자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오늘날 우리 삶의 문제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성공과 경쟁, 욕망, 신분상승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독자에게 명보의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자네의 선함을 증명할 만한 기회만 주어졌다면, 자네도 옳은 길을 선택하지 않았겠어?"(p.128)

김주혜의 <작은 땅의 야수들>은 혹독한 시절을 야수처럼 살아내야 했던 민중의 삶을 간결하고 생동감 넘치는 필력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탄탄한 한국 역사 연구를 토대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내용이지만 지루할 틈을 주지 않을 만큼 흡인력이 뛰어나다.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에."(603쪽)라는 옥희의 마지막 독백은 우리를 삶의 의지로 이끌어준다. 무엇보다 작은 땅의 야수들을 기억하고 알려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근대사 지식과 사랑 이야기의 재미를 동시에 얻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덧붙이는 글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지은이), 박소현 (옮긴이),
다산책방, 2022


#김주혜 #작은땅의야수들 #역사의주체 #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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