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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과 독일, 인도까지 복원에 나선 유적지

[캄보디아] 천년의 역사 앙코르 와트와 세계인의 유산

등록 2023.01.26 21:00수정 2023.01.26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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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놈펜에서 버스로 여섯 시간 정도를 달려 캄보디아 서부의 시엠립에 도착했습니다. 이 정도 버스 여행은 이제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약간 졸기도 했다가, 흙먼지가 날리는 도로 주변을 구경도 했다가 생각보다는 수월하게 시엠립에 들어왔습니다.

시엠립이라는 이름은 익숙하지 않으실 수 있겠지만, 이 도시에 남아있는 유적은 모두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캄보디아에서 가장 중요한 고고학 유적인 앙코르 와트가 시엠립에 위치해 있습니다.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저로서는, 교과서에서 보던 작품들을 눈 앞에서 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입니다.


우리는 '앙코르 와트'라는 사원의 이름을 많이 기억하지만, 시엠립 주변에 남아 있는 유적이 앙코르 와트 하나 뿐인 것은 아닙니다. 도성이었던 '앙코르 톰'과 그 안의 '바이욘 사원', 그 외에도 인근 지역에 여러 화려한 사원들이 때로 폐허가 되어, 때로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거대한 유적군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하루 만에 다 보기 어려워,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이틀 이상 시간을 들여 관람할 정도입니다. 사실 앙코르 유적이 캄보디아 역사에서 가지고 있는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넓은 유적군이 형성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앙코르 유적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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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엠립 시내 ⓒ Widerstand


캄보디아 땅에는 기원후 1세기 무렵부터 '푸난'이나 '진랍'이라고 불리는 국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록의 부족으로 정확한 사회상을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푸난'과 '진랍'이라는 이름조차 중국 사서에서 등장하는 이름일 뿐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습니다.

이들 국가의 구성 민족이 실제로 지금의 캄보디아인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가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사실 애초에 국가 형태 역시 우리가 상상하는 단일한 중앙집권적인 형태보다는 후원-피후원 관계에 기반한 분권적인 체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동남아시아사에서는 이런 구조를 불교 탱화에 비유해 '만다라적 정치체제'라고 부릅니다.

이후 8세기 무렵, 캄보디아의 해안 지대는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서 성장한 샤일렌드라 왕조의 지배를 한동안 겪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샤일렌드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진랍의 왕자가 돌아와 독립을 선언하고 샤일렌드라를 몰아내 성립시킨 왕조가, 캄보디아 역사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크메르 제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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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경 착공된 타 케오 사원. ⓒ Widerstand


물론 이설이 있기는 하지만, 크메르 제국을 세운 진랍의 왕자가 바로 '자야바르만 2세'였습니다. 건국 당시부터 크메르 제국은 시엠립 인근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큰 강이 있지는 않지만 인근에 동남아시아 최대의 호수인 '똔레삽 호수'가 있어 지리적으로 유리한 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시엠립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앙코르 유적군은 바로 이 시기, 크메르 제국이 성립된 9세기 인근부터 오랜 기간 만들어진 유적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아주 거대한 도시였겠지만 사람들이 살던 집은 주로 목조로 만들어져 남아있지 않고, 석조로 만들어진 사원이나 도성 정도가 지금까지 남은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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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욘 사원에 새겨진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 ⓒ Widerstand


크메르 제국이 전성기를 이룩한 것은 12-13세기 무렵이었습니다. 인도차이나 해양 지역의 무역권을 장악하는 패권 국가로 성장하기까지 했죠. 이 시기를 이끌었던 왕이 수르야바르만 2세였고, 그가 만든 사원이 바로 앙코르 유적군의 핵심으로 꼽히는 앙코르 와트입니다. 그 뒤를 이은 자야바르만 7세 역시 참족의 침입을 극복하고 도성인 앙코르 톰을 건설하기도 했지요.

크메르 제국은 이후 점차 약화되어 14세기 무렵 서쪽으로 미얀마와 태국, 동쪽으로 베트남의 침입을 받으며 쇠퇴합니다. 이후로는 크메르 제국에 대해 남은 기록조차 아주 희소해서, 14세기 초반까지 크메르 제국을 지배한 자야바르만 9세 이후 약 200년 동안 왕의 이름 하나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을 정도입니다.

주변국의 기록과 발굴 자료를 종합해 보면, 크메르 제국은 15세기 초반에 수도를 지금의 프놈펜 부근으로 옮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태국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서였지만, 그 뒤에도 태국과 베트남의 압력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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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뒤덮은 타 솜 사원. ⓒ Widerstand

결국 태국과 베트남의 침입이 절정에 이른 17-18세기 무렵, 캄보디아는 이제 베트남과 태국의 양가적인 식민지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국가 자체가 사라지고, 캄보디아인은 양국의 소수민족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죠.

결국 이 위기 상황에서 캄보디아는 외부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렇게 캄보디아는 동방 진출을 서두르고 있던 프랑스를 끌어들이게 되죠. 1863년, 캄보디아의 국왕 노로돔은 캄보디아를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삼는 조약에 자진해서 서명합니다. 곧 캄보디아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앙코르 유적을 건설한 거대한 크메르 제국은 스스로 그 멸망과 식민지화를 자처한 셈입니다. 국가를 프랑스에 헌납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국가가 소멸하고 캄보디아인이 타국의 소수민족이 될 수 있는 위기가 닥쳤던 상황에서, 캄보디아가 선택할 수 있었던 선택지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실제로 프랑스의 보호령이 된 뒤 캄보디아는 시엠립과 바탐방을 비롯한 상당한 영토를 태국으로부터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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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놈 바켕의 사자상. ⓒ Widerstand


놀랍게도, 천여 년 전에 만들어진 앙코르 유적군은 이런 국제관계의 역설적인 면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를 꽤나 던져주고 있습니다.

언급했듯 앙코르 와트는 12세기 수르야바르만 2세가 건설한 사원입니다. 하지만 수르야바르만 2세가 사망한 뒤 건설은 중단되었습니다. 앙코르 와트는 사원 치고는 독특하게 동쪽이 아닌 서쪽을 정문으로 하고 있습니다. 부조 역시 시계 방향이 아닌 반시계 방향으로 구성되어 있죠.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전설 같은 이야기가 떠돌기도 하지만, 사실 힌두 사원 건축을 조금만 알고 있다면 그 이유는 자명합니다. 원래 힌두 사원은 동쪽으로 들어와 시계방향으로 탑돌이를 하지만, 무덤으로 사용되는 사원은 서쪽으로 들어와 반시계방향으로 탑돌이를 합니다. 이곳이 수르야바르만 2세의 무덤으로 건설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이유입니다.

생물처럼 변화한 앙코르 유적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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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악 포안 전경. ⓒ Widerstand

 
하지만 수르야바르만 2세가 사망해 묻혔다고 해서, 그 뒤에 앙코르 와트가 그대로 남겨진 것은 아닙니다. 부조나 건물은 그 뒤에도 지속적으로 추가되었죠. 12세기 말 크메르 제국이 불교를 국교로 채택하며 힌두교 도상 대신 불교 도상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다시 힌두교로 돌아온 뒤에는 불교 도상의 파괴와 힌두교 도상으로의 복원도 이루어졌습니다. 부조는 계속 파괴되고 또 복원되며 변화했죠.

크메르 제국이 시엠립을 떠나 프놈펜으로 옮긴 이후에도 앙코르 와트는 방치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7세기까지도 캄보디아의 왕실은 앙코르 와트를 멀리서나마 관리하려고 끊임없이 애썼습니다.

앙코르 와트 뿐만이 아닙니다. 앙코르 유적군의 모든 건물들이 그렇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건물과 조각은 만들어지고, 무너지고, 복원되고, 또 파괴되었습니다. 여러 시대의 다양한 사람들이 정비하고 만들어낸 작품이었죠. 건물 하나하나가 농축된 1천 년의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유적군 전체가 몇 세기 동안 살아있는 생물처럼 변화한 것입니다.

그 역사성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19세기부터 프랑스를 중심으로 세계 각국의 고고학자들이 앙코르 유적군을 발굴, 복원하는 작업에 나섰습니다. 지금까지도 앙코르 유적 곳곳에서는 복원 프로젝트에 참가한 다양한 국가의 국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중국, 일본, 한국, 독일, 인도까지 아주 다양한 국가를요.

어떤 의미에서 앙코르 유적군은 이 땅을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 국적도 시대도 막론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낸 유적인 셈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인의 유산이지요. 실제로, 앙코르 유적군의 발굴과 복원 경험은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근대적인 개념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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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와트의 일출. ⓒ 김찬호


그렇게 지난 천 년을 살아있는 생물처럼 변화해간 앙코르 유적의 아름다운 경관을 걷고 있자면, 그런 세계와 국제관계에 대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어느새 정작 힌두교 미술과 불교 미술을 배우던 때 공부하던 작품들보다는, 지금 우리 세계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는 더 많아졌습니다.

누군가는 캄보디아를 프랑스에 헌납한 국왕이 국가의 멸망과 식민지화를 자처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습니다. 당연히 그것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겠죠. 실제로 캄보디아는 그 이후로 한 세대가 넘게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겪어야 했으니까요. 앙코르 유적의 발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서구인의 '발견'으로 시작되어, 여전히 그들이 주도하고 있는 발굴과 복원 사업에 불편한 시선을 보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복원해낸 앙코르 유적을 앞에 두고 있자면, 그게 어떤 방식이든 이것을 지켜내고, 복원하고, 연구해낸 것이 옳은 결말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결말이 아닌 과정의 올바름도 따져봐야 하겠지만, 결말만을 두고 보자면 이것이 방치되고 파괴되는 것을 그저 지켜보는 것이 옳은 결말은 아니었겠지요.

어쩌면 제가 외국인이라 할 수 있는 비겁한 변명일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결국, 이 유적들을 지켜냈다면 모든 것을 지켜낸 것이 아닌가 여전히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앙코르 유적이라는 "세계"의 유산을 세계의 시민인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이유이면서, 지난 세대의 세계인들이 만들어낸 성과와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도 동시 게재됩니다.
#세계일주 #캄보디아 #시엠립 #앙코르와트 #앙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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