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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가 용납할 수 없었던 노래

치안 방해와 풍속을 무너뜨린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된 <서울 노래>와 <서울뜨기>

등록 2023.02.06 11:08수정 2023.02.06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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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새해가 되면 각 신문사마다 시, 소설 등 여러 장르의 신춘문예 당선작을 발표하고 있다. 그 위상이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신진 문인의 등용문으로서 신춘문예가 하고 있는 역할은 여전히 작지 않은 편이다.

신춘문예의 모습과 의미는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 왔는데, 과거 1930년대에는 시와 시조, 한시 등과 함께 노래 가사도 신춘문예 장르로 설정되어 있었다.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가사로 유명한 <조선의 노래>도 193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창가' 당선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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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조선의 노래> ⓒ 동아일보사

<동아일보>의 노래 가사 현상모집은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못했지만, 1934년에는 특기할 만한 선정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가사가 당선되었다고 해서 모든 작품에 곡조가 붙고 음반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1934년에 뽑힌 두 곡은 모두 실제 노래로 만들어졌고 음반으로도 발매되어 지금까지 들을 수 있다. 게다가 두 곡 다 음반이 발매되자마자 금지곡 목록에 오르는 얄궂은 운명을 맞기도 했다.


당선작 없이 가작으로 뽑힌 두 작품은 <서울 노래>와 <서울뜨기>. <서울 노래>는 1930~1940년대 가장 뛰어난 대중가요 작사가로 활약한 조명암의 작품이며, 그의 가사 데뷔작이기도 하다. 1934년 4월 20일에 콜럼비아레코드 5월 신보로 발매된 <서울 노래>는, 그러나 이미 하루 전 4월 19일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금지를 결정한 상태였다.

때문에 음반회사에서는 급히 발매를 거두어들이고 한 달 뒤에 가사를 대폭 고친 '개작' <서울 노래>를 다시 제작해 내놓게 된다. <서울 노래>가 금지를 당한 이유는 '치안 방해'였는데, 개작 전 가사를 보면 조선의 민족의식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점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원작 <서울 노래> 듣기).

같은 신춘문예 출신에다 금지곡 목록에도 함께 오른 <서울뜨기>는 <서울 노래>와 경우가 조금 달랐다. '풍속 괴란(壞亂)', 즉 풍속을 무너뜨리고 어지럽혔다는 것이 <서울뜨기>의 금지 이유였으며, 구체적인 내용은 신춘문예 가작으로 뽑힌 당시 가사를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서울뜨기 시골뜨기 말라빠진 꼴뚜기/ 오라 서울 보라 서울/ 납작납작 기와집이 비슷비슷 지대고/ 구불구불 골목길이 막다른 듯 터진 듯/ 오 이게 서울 우리 서울 오라 보라 이 서울
나물 장수 비지 장수 악만 쓰는 무 장수/ 오라 서울 보라 서울/ 짤깍짤깍 엿가위에 토막토막 노랑엿/ 허덕허덕 광우리에 방게 드렁 사려/ 오 이게 서울 우리 서울 오라 보라 이 서울
아편쟁이 비렁뱅이 곰배팔이 깍쟁이/ 오라 서울 보라 서울/ 쩔뚝쩔뚝 거짓 병신 집집 대문 손님들/ 나리 마님 돈 한 푼만 적선해 줍시오/ 오 이게 서울 우리 서울 오라 보라 이 서울
행랑살이 더부살이 뼈만 남은 움살이/ 오라 서울 보라 서울/ 지게 지고 네거리서 우묵허니 멀거니/ 여보 바보 우어이어 장님 불러 점이나/ 오 이게 서울 우리 서울 오라 보라 이 서울
청개천내 다리 알서 묵은 성돌 너머로/ 오라 서울 보라 서울/ 새벽부터 밤중까지 살려 살려 헤매도/ 따귀 맞고 눈 흘기고 막걸리에 분풀이/ 오 이게 서울 우리 서울 오라 보라 이 서울
 
전체 5절 가운데 후반 3~5절에 문제가 됐음직한 구절들이 여럿 눈에 띈다. 대중가요 가사에서는 좀처럼 찾아 보기 어려운 아편쟁이와 비렁뱅이가 등장하고, 지게꾼의 살림은 뼈만 남은 움막살이로 그려진다. 그래도 살아 보려고 하루 종일 헤매도, 여기저기서 따귀 맞고 결국은 막걸리 한 잔에 분풀이를 할 뿐이다. 식민지 수도 경성의 화려한 '모던' 이면에 엄존했던 도시 빈민의 일상을 나름 솔직하게 표현한 내용, 그것을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용납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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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들 ⓒ 동아일보사


<동아일보> 1934년 1월 1일자에 실린 '신춘현상문예 당선자 발표'에는 <서울뜨기> 제목이 '서울뜨기 언파레이드'로 되어 있고, 작자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며칠 뒤 1월 5일자에는 위에서 본 가사와 함께 작자가 이해남으로 소개되어 있고, '서울 똥꼴아범 노래'라는 또 다른 제목이 등장한다. 똥꼴, 즉 똥골은 당시 빈민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서울 현저동 일대를 이르므로, <서울뜨기> 가사의 의도가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제목이라 하겠다.

작자 이해남은 1973년에 한양대학교 총장을 잠시 맡기도 한 사학자로, 드러난 대표 이력으로만 보아서는 <서울뜨기> 같은 가사를 썼다는 것이 다소 뜻밖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글재주가 상당했던 그는 193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이 당선된 것은 물론,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도 가사 <서울뜨기> 외에 희곡 <인간 만화>로 겹당선이 된 문학청년이기도 했다.

가사가 먼저 만들어진 <서울뜨기>는 <서울 노래>와 마찬가지로 콜럼비아레코드에서 음반을 제작하기로 결정이 되어, 전속 작곡가 김준영이 작곡을 맡았다. <서울 노래> 금지 결정으로 상황이 다급했을 1934년 4월 22일에는 경성공회당에서 당선 가요 발표 음악회가 열렸는데, 이때 <서울뜨기>도 연주되었음이 확인되다.


최종 완성된 <서울뜨기>는 5절로 된 원작과 달리 4절로 축소되었고, 원작의 세 번째와 네 번째 절이 자리를 바꾸었으며, 일부 구절이 약간 수정되어 있다. 한 절이 줄어든 것은 음반 녹음 시간을 고려한 것일 테고, 가사 순서가 바뀐 것은 검열에 대비한 나름의 조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편쟁이 비렁뱅이'보다는 '뼈만 남은 움살이'가 먼저 나오는 편이 검열관들에게 덜 거슬릴 것이라 판단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노래가 다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서울뜨기> 음반이 실제 발매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어쩌면 <서울 노래>가 금지되고 개작되는 일련의 소동이 콜럼비아레코드를 주저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발표 음악회가 열린 뒤 반년이 지난 1934년 10월 23일, <서울뜨기>가 다시 등장한 곳은 음반이 아닌 방송이었다.

경성방송국 라디오 저녁 9시 '가요곡' 프로그램에 첫 번째 곡으로 <서울뜨기>가 선곡되었고, 노래를 부른 이는 배우 겸 가수로 인기가 높았던, 지금은 배우 최민수의 외할아버지로 더 알려진 강홍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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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뜨기> 등 라디오 방송 내용 ⓒ 동아일보사


공연과 방송을 거친 뒤 <서울뜨기> 음반이 발매된 때는 1934년 11월 하순이었던 듯하다. 발매 광고가 확인되지 않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서울 노래> 예에서 보았듯이 12월 신보로 선정되어 11월 20일쯤 발매를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두 주가 지난 12월 4일에는 <서울뜨기>에 대한 금지 결정이 내려졌다.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서울뜨기> 가사와 작자, 그리고 음원까지도 모두 확인이 되었으나, 정작 음반은 아직까지 공개된 바가 없다. 음반이 보이지 않는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이유는 다행히도 일본에 녹음 원반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서울뜨기> 듣기).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실로 특기할 만한 존재인 <서울뜨기> 음반은 지금 어딘가에 조용히 묻혀 있는 것일까, 아니면 금지 당시에 모조리 압수되어 폐기되었던 것일까. 노래를 찾는 사람이 풀어야 할 숙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덧붙이는 글 <서울 노래> 듣기 https://youtu.be/aRp6Ber8stU

<서울뜨기> 듣기 https://youtu.be/-mMTo-8PQRY
#서울뜨기 #금지곡 #신춘문예 #이해남 #강홍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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