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26 07:00최종 업데이트 23.01.26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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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차 누드모델 정규리의 시선. 사진으로 찍히고 그림으로 그려지고 이미지로 소비되는 '대상'의 관점으로 누드모델 일을 다룹니다.[기자말]
나는 10년차 누드모델이고 레즈비언이다. 성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지만, 부모님에게 내 직업을 털어놓는 것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엄마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내 비장한 고백에는 별 감흥이 없어 보였는데, 몇 년 전 연말정산으로 드러난 내 주된 수입원을 보고 어디서 배워 온 것 같은 반응을 했다.

"엄마가 널 키울 때... 뭘 잘못 했니?"

누드모델이라는 직업은 이제 많이 알려졌지만,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누드모델의 영역은 생각보다 넓다. 미술이나 사진 작업 외에 의료 목적으로 필요한 MRI 촬영, 3D 모델링, 영화의 단역, 공연의 엑스트라 일도 있다.

반드시 옷을 벗어야 하는 일은 아니기에, '누드모델'은 사실 정확한 용어는 아니다. 영어권의 동의어로 'figure model'을 번역한 '인체모델'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할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일은 나체를 필요로 하고, 국내에서는 더 일반적인 단어이기에 이 글에서는 누드모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려고 한다.
 
사람이되 사람이어서는 안 되는 일

나는 주로 조소, 회화, 크로키 등 미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누드모델 일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물어보는 건 두 가지다. "팬티까지 벗어요? 오래 버티는 거 힘들지 않아요?" 그럼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네, 누드모델인 걸요. 아뇨, 가만히 있는 것보다 자세를 바꾸는 게 더 어려워요"라고.
 
화실에서 모델의 포즈는 크게는 두 종류로 나뉜다. 조소나 유화 작업처럼 하나의 자세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고정 포즈와 '손을 푼다'고 표현되는, 3~5분 크로키 포즈. 어느 쪽이든 조형적으로 아름다운 자세를 취하려면, 몸의 모든 관절에 각도를 줘야 한다. 척추는 회전하고, 어깨와 골반은 기울어지고, 무릎도 팔꿈치도 직선이어선 안 된다.

이걸 갖추면서도 20~30분 동안 흔들리지 않고 안정적이어야 한다. 근육 경련이 일어날지언정 넘어지면 안 된다. 그리는 사람의 몰입을 깨는 것이기 때문이다. 크로키에선 포즈를 취하는 시간이 짧을수록 더 어려운 자세를 취한다. 15~30초에 한번씩 바뀌는 스피드 크로키의 포즈를 취할 때에는 거의 춤을 추는 기분이 든다. 타이머가 울릴 때마다 동서남북으로 입상/좌상/와상을 골고루 배치하는데, 모든 포즈가 제각기 아름다우면서 서로 달라야 하고, 어떤 방향에서 보아도 '그릴 만' 해야 한다.

쓰고 보니 정말 어려운 직업이다. 그렇지만 모델 일의 어려움은 몸의 고됨이 전부는 아니다. 사람이되 사람이어서는 안되는 일, 내게는 이 부분이 가장 어렵다.
 

Olympia(1865) by Edouard Manet ⓒ Edouard Manet

 
미술 수업에서 누드모델의 위치는 독특하다. 학생은 모델에게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모델을 도구로 배운다. 화가는 모델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모델을 참고한다. 사람의 몸이 재료 혹은 교구인 것이다.

여기에 누드모델의 난관이 시작된다. 모델이 그림을 망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화가와 눈을 맞추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을 응시하는 사람과 눈을 맞추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모델은 그 '본능'을 거슬러 의도적으로 시선을 피한다.

화가가 보는 것은 모델이 아니라 화가 안의 이데아이기 때문이다. 시각예술의 고전적인 문법 속에서, 창작자의 시선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초상화 속 왕족이나 화가의 애인('뮤즈') 뿐이다.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에서 그림 속 여성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 관찰자(감상자)를 똑바로 쳐다보아 논란이 된 것은 이와 같은 고전적 문법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태연함'이라는 복장

내가 처음 일을 시작했던 2013년은, 불과 10년 전이지만 지금과는 상황이 무척 달랐다.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이미지 기반 소셜미디어가 유행하기 전이고, 그러한 소셜미디어에서 '바디프로필' 열풍이 불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기 위한 바디프로필 사진을 찍기 위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모객하려고 헬스 트레이너가 바디프로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것, 이 순환 속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은 피사체가 되는 경험을 한다.

타인 앞에서 옷을 벗는 것의 무게가 가벼워지면서, 옷을 벗고 돈을 버는 일의 가치가 떨어졌다. 당연히 누드모델의 시급은 10년째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물론 직업인으로서 좋은 변화도 있다. 누드모델에 대한 터부가 옅어진 것이다. 
  

한국누드모델협회 하영은 회장의 자서전 <나는 누드모델입니다> ⓒ 라곰

 
한국 최초의 누드모델협회인 '한국누드모델협회'의 설립자이자 35년 경력의 누드모델인 하영은 대표님은 1988년에 누드모델 일을 시작하셨다.

누드모델이 겪는 부당한 대우와 편견에 당당히 맞서기 위해 협회를 조직한 선생님은, 화실에서 명함을 나누어 주면 '이런 걸 집에 들고 가면 술집 여자한테 명함을 받은 걸로 아내가 오해한다'며 눈 앞에서 명함이 찢겨 버려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세미누드를 찍기 위해 직업 모델이 아닌 일반인이 포토그래퍼를 고용하는 시대이다. 여기서 직업 누드모델의 두 번째 어려움이 생긴다. 돈을 주고 찍을 만한(또는 그릴만한) '벗은 몸'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보통 직업을 표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복장(제복)을 입는 것이다. 군인, 경찰, 소방관, 의사 등이 대표적이다. 누드모델에게는 제복이 없다. 나체가 너무도 흔한 시대에, 누드모델의 자격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내가 생각해 낸 전략은 모델-되기를 하나의 퍼포먼스로 이해하는 것이다. 무대(모델다이)에 올라 가운을 벗기 전, 교실 문에 노크를 하고 들어갈 때부터 퍼포먼스는 시작된다. 프로페셔널한 애티튜드 유지가 그 퍼포먼스의 핵심이다.

가운은 길고 부드러운 걸로, 배경음악은 수업 종류에 따라 신중하게 미리 선곡, 스피커는 저음이 강한 고가 제품으로. 음악이 갑자기 꺼질 때도, 타이머가 말을 안 들어도 허둥대면 안 된다. 손이 떨리는 건 막을 수 없어도 표정은 평온하게 유지할 것, 물을 마실 때도 벌컥벌컥이 아니라 가볍게 목을 축이듯이. 벌거벗은 건 별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책 <다른 방식으로 보기>(1972)에서, 존 버거는 '누드란 복장의 한 형식이다'라고 설명한다. 무대 위에서 누드모델이 입을 수 있는 복장은 단 하나, 바로 태연함이다.10년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태연하게, 나는 말한다.

"엄마, 내 직업은 남 앞에서 옷을 벗는 일이야, 이게 내 천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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