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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도 친구도 다 속았다...신혼부부 울린 공인중개사의 이행각서

[개미지옥, 전세사기 ③] '전세금 보전' 각서에 안심했다가 결국 당해

등록 2023.02.01 07:08수정 2023.02.01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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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왕 1139 채, 빌라의 신 3493 채, 빌라 왕자 413 채. 거대 전세사기가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깨끗한 등기부, 공인중개사의 추천을 믿고 전세를 계약한 보통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보증금을 날리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거나 대출금 변제를 위해 몸부림처야 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치밀한 수법의 전세사기 개미지옥은 왜 생겼는지, 피해자의 목소리를 통해 연속 보도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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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현(37)씨는 지난 2019년 4월, 공인중개사로부터 '부동산(아파트) 전세 계약서 별지'를 건네받았다. 여기에는 '중개인은 중개 사고 시 당 임대차 계약의 보증금 보전을 책임질 것을 확인합니다', '경매 상황으로 낙찰될 시 주택임대차보호법에 의거해 최우선변제금액과 배당금으로 전세보증금이 지급되지 않은 차액을 지급할 것을 확인합니다'라고 적혀있었다. ⓒ 김태현

 
"제물포역 쪽이 신축 빌라도 많고, 시세도 저렴해서 이쪽만 알아봤죠. 직장 동료가 그 집에 살고 있었거든요. '우리가 계약한 부동산에 가봐' 하면서 소개해주더라고요."

지난 2019년 4월, 당시 결혼을 앞둔 예비 부부였던 김태현(37)씨와 정혜진(29)씨는 신혼집을 찾고 있었다. 공인중개사사무소 3곳을 통해 10여 채의 집을 둘러보던 김씨와 정씨는 49㎡ 규모의 깔끔한 아파트형 빌라 A를 발견하게 됐다. 

지난 1월 26일 인천 미추홀구 제물포역 인근에서 <오마이뉴스> 기자를 만난 김씨는 "처음에는 월세를 알아봤는데, 친구들이 '왜 월세로 가냐. 대출 알아봐라'라고 하길래 전셋집을 찾아봤다. 그런데 4년 전에는 전세 구하기가 힘들었다"며 "인천에서도 저렴한 동네로 알아봤는데, 부모님 도움 없이 집을 얻으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2015년에 새로 지어진 아파트형 빌라 A는 인천에 직장을 두고 생활하고 있는 신혼부부들 사이에서 저렴하고, 깔끔한, '괜찮은 집'으로 통했다. 안정적으로 오랫동안 거주할 집을 구입하기 이전에 2~3년 동안 거주하기 좋은 집으로 인기가 높았다. 김씨는 "저희가 입주하기 전에 살던 분들도 신혼부부였는데, 전세로 살았다고 들었다"고 했다. 

직장 동료가 실제 거주 중에 추천한 집인데다, 주변 지인들도 근처 비슷한 빌라에 많이 거주하고 있던 터라, 김씨 부부는 자연스럽게 전세 계약을 추진하게 됐다. 정씨는 "당시에는 결혼 준비로 엄청 바빴다. 빨리 신혼집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했다. 김씨도 "저렴하고 일하는 곳이랑도 가까워서, 계약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직장 동료도 살던 집...신혼부부 사이 인기 높았던 아파트형 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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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미추홀구에 2015년 새로 지어진 아파트형 빌라 A는 인천에 직장을 두고 생활하고 있는 신혼부부들 사이에서 저렴하고, 깔끔한, '괜찮은 집'으로 통했다. ⓒ 네이버

 
수상한 점은 전세금 대출 과정에서 조금씩 드러났다. 김씨는 "아무래도 대출을 받는 게 중요했는데, 부동산에서 국민은행에 가보라고 해서 갔더니 거기서는 퇴짜를 맞았다"며 "이 건물에 근저당이 너무 많이 잡혀있어 안 된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전세보증금 8000만 원으로 전세 계약을 알아보던 김씨가 해당 주택에 집주인 양○○씨 명의로 1억4000만 원의 빚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시점이었다. 하지만 327채 규모의 전세사기 사건 중 하나가 될줄 그때는 몰랐다. 

계약을 망설이고 있는데 이런저런 말들로 부추긴 건 공인중개사였다. 그는 "부동산에서 '걱정 안 해도 된다. 집주인이 몇 년째 대출 이자도 잘 내고 있고, 지금까지 문제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얘기했다"며 "우리은행에 가면 전세 대출이 나올 거라고 해서 서류를 보강해 찾아갔더니, 중소기업 청년 전세자금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공인중개사로부터 '부동산(아파트) 전세 계약서 별지'를 건네받았다. 여기에는 '중개인은 중개 사고 시 당 임대차 계약의 보증금 보전을 책임질 것을 확인합니다', '경매 상황으로 낙찰될 시 주택임대차보호법에 의거해 최우선변제금액과 배당금으로 전세보증금이 지급되지 않은 차액을 지급할 것을 확인합니다'라고 적혀있었다.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할 상황이 발생하면, 공인중개사가 책임지고 전세금 전액을 세입자에게 주겠다는 의미였다. 서류에는 계약을 진행한 공인중개사의 도장도 찍혀있었다.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전세사기 가운데서도 '인천 미추홀구 공인중개사 이행각서 사건'으로 분류되는 수법이었다. 

김씨는 "매번 월세로 살다가, 전세 대출은 그때 처음 받아봤다. 부동산 말만 너무 믿었던 것 같다. 그 서류도 당시에는 그저 믿었다"며 "결과적으론 제가 잘 몰라서 (일어난 일)"이라고 스스로를 탓했다. 정씨도 "그때 제가 25살이었는데,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며 "중개수수료로 80만 원을 썼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 이상한 것 투성이지만, 당시에는 잘 몰랐다"고 한탄했다. 

한순간에 휴지조각 된 이행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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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잔금을 치른 뒤 별탈없이 살아가던 김씨 부부가 전세금을 통째로 날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점은 2022년 6월 해당 주택이 경매로 넘어가고도 한 달이 지나서였다. ⓒ 김태현


해당 이행각서는 법적 효력을 지닌 서류다. 다만, 실제 주택에 문제가 생길 경우 공인중개사가 세입자의 전세금을 감당할 자산을 보유하지 않은 상태라면 실질적 효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장석호 공인중개사는 1월 27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민사소송을 진행하게 되면 이행각서를 이용해 공인중개사의 재산을 압류해 회수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상 실질적인 효력은 없을 것으로 본다"며 "공인중개사들이 이행각서를 써줄 당시 전세금을 반환해줄 경제적 여력이 있었다면 사기로 보기 어렵겠지만, 당시 아무런 재산도 없었다면 명확한 사기"라고 설명했다. 

2019년 4월, 잔금을 치른 뒤 별탈없이 살아가던 김씨 부부가 전세금을 통째로 날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점은 2022년 6월 해당 주택이 경매로 넘어가고도 한 달이 지난 때였다. 김씨는 "지난해 7월 집집마다 법률사무소에서 보낸 똑같은 우편물이 꽂혀있었다"며 "갑자기 왜 이런 게 왔나 해서 봤더니, 이 집이 경매에 넘어갔다는 내용과 사건번호들이 적혀있었다"고 했다. 전세금을 돌려받으려면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니, 그때 자신들을 써달라는 취지의 영업용 우편이었다.  

놀란 김씨 부부는 전세 계약을 진행했던 공인중개사를 찾았지만, 또 다시 "걱정 말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김씨는 "부동산에선 '별일 아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고 말했다. 하지만 마주한 현실은 달랐다. 정씨는 "법률구조공단을 통해 알게 됐는데, 저희는 한 푼도 받을 수가 없다고 하더라. 경매로 넘어간 집을 누군가 낙찰받더라도, 은행에서 (임대인의 빚) 1억4000만 원을 모두 가져간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고 했다. 

최근 부동산 경기 침체로 인해 낙찰가가 대폭 내려갈 가능성이 높아 김씨 부부가 이에 참여하더라도 전세금을 보전받기 어렵고, 여기에 임대인의 기존 채무까지 떠안아야 한다는 얘기다. 자영업자인 김씨가 추가 대출을 받는 것도 만만치 않지만, 대출을 받더라도 시세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집을 구입해야 하는 구조다. 정씨의 말이다. 

"당장 오는 4월에 전세대출 6400만 원을 상환해야 돼요. 만약에 제가 그걸 갚지 못하면 신용불량자가 된다 하더군요. 법률구조공단에선 개인회생을 알아보라는데, 지금은 제가 직장을 그만뒀거든요. 아이도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분은 '이혼을 해라'라고도 하던데, 그러기엔 아이가 있잖아요. 저희가 갚아야 할 돈이 아닌데, 저희 빚이 돼버렸어요. 개인회생을 할 수도 있지만, 앞으로 더 살기 힘들어질 것 같아서 고민입니다."

혼란스러워하는 김씨 부부에게 공인중개사는 전세금을 높여 재계약할 것을 권했다. 김씨는 "집이 경매 넘어간 뒤 부동산에선 액수를 높여 다시 계약하라고 했다. 보증보험 가입도 가능하다면서 안심시켰다"며 "그때는 그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뉴스를 보니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이제는 거의 다 포기한 상태"라고 했다. 

임대 사기 고소... 경찰 묵묵부답 

14층 총 2개 동인 해당 주택에 거주 중인 세입자 가운데 100여명이 김씨 부부와 유사한 상황에 놓여있다.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아파트형 빌라 B, C 등도 마찬가지다. 김씨 부부의 전세계약을 맡아 이행각서까지 써 준 공인중개사의 휴대전화번호는 현재 '없는 번호'가 됐고, 공인중개사사무소도 폐업했다. 김씨는 "저희가 갔던 부동산은 2~3달 전에 사라졌다"며 "근처 부동산 5군데가 다 그런 상태라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김씨 부부에게는 이 집을 안전하게 벗어날 기회는 있었다. 지난 2021년 4월, 재계약 시점이다. 김씨는 "집주인이 전세금을 2000만 원 올려달라고 해서 난감했다. 법적으론 5%까지 올릴 수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내가 거의 만삭일 때여서 이사를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사정을 설명했고, 1500만 원 증액으로 재계약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이후 전세금 9500만 원을 모두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상 휴지조각이 된 공인중개사의 이행각서를 믿었던 탓이다. 

부부에게 전셋집과 공인중개사사무소를 소개해준 직장 동료의 전셋집도 경매로 넘어간 상황이다. 정씨 친구가 전세로 살고 있던 신축 빌라도 경매로 넘어갔다. 인천 미추홀구 곳곳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됐다. 지난해 7월 김씨 부부는 임대인 양씨를 사기로 고소했지만, 경찰은 현재까지 묵묵부답이다. 김씨의 말이다. 

"처음에는 막 열불나고 화도 났는데, 점점 내려놓게 되더라고요. 방법이 없으니까요. 원래는 차곡차곡 모아서 집도 사고 그러려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요. 아무래도 작은 집, 월세로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희 집만 이런 게 아닌데, 이런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답답합니다."
#전세사기 #빌라사기 #미추홀구 #이행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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