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기왕 전설을 통해 본 변방 강원도의 역사

등록 2023.02.02 10:23수정 2023.02.02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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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을 찾아가는 길'이란 결코 멀고 궁벽한 곳을 찾아가는 것이 아님을, 각성과 결별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바로 변방임을 깨닫게 된다.
- 신영복 <변방을 찾아서> 중에서
 

강원도 횡성에서 가장 높은 태기산에는 산성이 있다. 전쟁에서 패한 태기왕과 군사들이 피신해서 산성을 쌓고 재기를 도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두구미재에서 올라가는 코스 말고 청일면 신대리에서 작은 성골을 거쳐 가는 등산로를 따라가면 태기산성을 볼 수 있다. 완만한 양두구미재 코스에 비해 된비알이 많아 힘이 들지만 태기산성을 지나면서 경사가 완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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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기산 정상 눈 덮인 태기산 정상 ⓒ 이기원

 
태기왕의 행적은 전설로 전해지는데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진한의 왕이었던 태기왕이 삼랑진 전투(현재 경상도 밀양)에서 패퇴하여 횡성 일대로 들어와 재기를 도모하다가 신라군의 기습 공격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전설, 춘천을 기반으로 했던 맥국의 왕이었던 태기왕이 춘천 전투에서 패퇴하여 홍천을 거쳐 횡성으로 들어와 재기를 도모하다 다시 패하고 평창 일대로 퇴각했다는 전설로 구분된다.

태기왕을 진한의 왕으로 볼 것인지, 춘천을 근거로 했던 맥국의 왕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차이는 있다. 반면에 전쟁에 패해서 횡성 일대로 들어와 재기를 도모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내용은 유사하다.


횡성 갑천, 청일, 둔내 일대에는 태기왕과 관련된 지명이 곳곳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신라군에 패해 횡성 일대로 들어온 태기왕 군사들이 냇가에서 갑옷을 빨아 널었다는 갑천, 태기왕 군대가 주둔했다는 병지방, 태기왕이 산성을 쌓았다고 해서 덕고산에서 명칭이 바뀐 태기산, 태기왕을 추격해온 박혁거세가 올랐다고 하는 어답산, 재기에 실패하고 태기왕마저 숨을 거둔 후 태기왕이 이끌던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새로운 마을을 개척하고 살았다는 신대리 등이 이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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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기왕 전설길 안내판 청일면 신대리에서 출발하여 태기 약수터, 태기산성을 거쳐 태기분교 터까지 연결되는 코스 ⓒ 이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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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기산성 표지석 태기산성은 해발 750~1000m 높이에 축조되었고, 현재 그 일부가 남아 있다. ⓒ 이기원

 
태기왕 전설에서 변방 강원도의 모습이 확인된다. 전쟁에서 패한 태기왕이 횡성 일대로 들어왔던 것처럼, 전쟁이나 정치적 이유로 수난을 당한 사람들이 강원도로 피신했던 사례는 많다. 신라 하대 왕족으로 태어난 아기 궁예는 왕위쟁탈전의 소용돌이에서 구하기 위해 궁녀들의 손을 거쳐 영월 세달사로 피했다.

임진왜란 당시 깊은 산과 골짜기가 많은 강원도는 한양 일대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피난처였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은 이필제의 난 이후 가혹해진 탄압을 피해 강원도로 들어왔다.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했던 사람 중 일부는 혁명이 실패한 후 강원도 산골로 숨어들었다.

추적과 탄압 속에서 단지 목숨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후일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태기왕은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궁예는 원주를 기반으로 중부 일대를 장악하고 후고구려를 세웠다. 최시형은 강원도에서 꺼져가던 동학의 불씨를 되살려 동학농민혁명의 토대를 만들었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 강원도 산골로 숨어든 사람들은 항일 의병운동에 뛰어들었다. 주류들의 삶과 거리가 멀었고, 사방이 심심산골이었던 변방 강원도는 쫓기는 사람들을 숨겨주고 품어주었다.
덧붙이는 글 제 계정의 페이스북에도 실었습니다.
#태기왕 전설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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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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