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항복 이후, 영국군의 귀환을 환영하는 싱가포르 시민들 한때 영국군 축출과 일본군 입성을 환영했던 현지 주민들의 태도는 전쟁을 거치며 180도로 변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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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선전에 따라 스스로도 백인 침략자 축출의 대의를 믿었고, 한때는 주민들에게 해방군으로 환영받았던 많은 일본군 장병들은 이와 같은 사태에 일종의 인지부조화를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요시미 요시아시는 저서 <풀뿌리 파시즘-일본민중의 전쟁체험>에서 토벌전 수행에 번뇌하던 한 군인의 일화를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필리핀 루손섬 타를라크에서 경비 임무에 종사했던 육군군조(현대 한국군의 중사에 해당, 1945년 4월 전사 시 계급) 이토 마사이치는 전쟁 말기의 대게릴라전에서 자신의 반장과 전우 4명이 전사했을 때의 심정을 아내에게 남긴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토민(필리핀인), 이 토민의 얼굴을 보는 것도 싫다. 어제까지 그토록 친밀하고 또 사랑했던 그들에게 혐오의 감정이 든다... 하지만 점차 그런 의식도 희미해진다. 이 사실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일본인은 일지사변(중일전쟁)에서 많은 지나인(중국인)을, 그것도 양민을 죽였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같은 혈족인 지나인들은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아버지를, 형을, 남편을 잃은 자식, 동생, 아내는 일본인을 증오하고 있지 않을까. 일본은 정의로운 전쟁을 이어왔다. 그러나 그 전쟁은 이와 같은 희생을 낳았다. 필리핀 토민도 필리핀 전선에서 그 골육을 무수히 잃고 있다. 토민이 이에 대해 무심할 리 없다.」
그는 필리핀 민중의 입장에 서서 생각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전쟁에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일본은 동아의 맹주로서 정치경제적으로 그들에게 안정과 행복을 안겨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신념이 있었고, 더욱이 전선에 참가하면서 '일본과 일본인이 동양에 갖는 사명을 통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일본인은 아시아인을 구원한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살해하고 있었다. 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생각해낸 유일한 방책은, 그리스도와 같이 '진정으로 그들(필리핀인)들에게 봉사하는 피의 희생적 사랑', '속죄의 마음'을 전 일본인들이 깨닫는 것이었다.
-吉見義明、2022, 《草の根のファシズム》岩波現代文庫、107-108p
제대로 규명·평가되지 못한 전쟁기 일본-아시아 문제
아시아 해방을 위해 싸운다는 사명감과 현실에서의 범죄적 행위들, 그리고 그 모순된 현실로부터 초래된 인지부조화는 하루 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개전 당시의 프로파간다, 서구 열강의 군대를 상대로 한 승리, 현지 주민들의 환영 등 구체적인 전쟁체험 속에서 견고하게 구축된 '성전론'은, '아시아인을 구원한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살해'하는 현실에 직면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큰 내적 동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전후의 도쿄재판에서 미군과 영국군 등 '백인 연합군'에 대한 전쟁범죄 단죄에 재판부의 역량이 치중되는 사이 아시아 민중의 피해가 외면되면서, 전쟁기 일본-아시아 관계의 문제는 제대로 규명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더욱이, 일본군이 현지에서 조직했던 보조병력들이 전후의 독립전쟁에 도움이 되거나, 일본군 패잔병들이 귀국하지 않고 현지 독립군에 합류했던 사례들, 그리고 신생독립국들이 부흥에 성공한 일본과의 경제협력에 절실한 입장이 되면서 동남아 지역 일본군에 대한 각국의 평가 또한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채 엇갈리게 되었다.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각국의 여러분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며 사과 성명을 발표하였다. 계승 여부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이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국 정부의 공식입장으로 유지돼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역사문제와 일본 사회의 아시아관이 거듭 화두로 오르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깊은 씁쓸함을 남긴다. 화해와 평화는 거시적 단위의 통계 아래에서 조명받지 못했던 복잡한 전쟁체험들을 들여다보고 그 실타래를 해명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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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인가, 살인자인가... 일본의 복잡한 전쟁체험, 그 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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