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08 09:35최종 업데이트 23.02.08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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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차 누드모델 정규리의 시선. 사진으로 찍히고 그림으로 그려지고 이미지로 소비되는 '대상'의 관점으로 누드모델 일을 다룹니다. [편집자말]
봄학기가 시작되기 전, 2월 초는 누드모델이 휴대전화를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때다. 전국 미술대학교들의 수업 시간표 구성이 완료되고, 모델 배정을 위해 연락이 오고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중개업체(에이전시)에 등록되어 있는 모델이라면 회사에서 고정 일을 배정하고, 프리랜서라면 대학교에 이력서(포트폴리오)를 보내고 핸드폰에 등록되어 있는 조교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방학 동안 느슨해졌던 뱃살에 다시 힘을 주는 때이기도 하다.

누드모델, 특히 여성 누드모델이 프리랜서보다는 에이전시와 일을 하는 이유는 직접 영업을 하지 않아도 되고, 사진 촬영 등에서 무리한 요구를 받거나 대금을 떼이는 경우를 회사가 막아주기 때문이다.
 

그림과 달리 얼굴과 신체 특성이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는 사진 촬영에 여성 모델은 훨씬 민감하다. ⓒ elements.envato

 
특히 사진 촬영의 경우 후자의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모델 일은 보통 시간을 단위로 임금을 받는데, 촬영은 작가가 원하는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이뤄진다. 통상 그러면 촬영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들이는 시간에 비해 가져가는 돈이 실속 없을 때도 있다.

모델은 인지도가 쌓일수록 수명이 짧아진다 

누드모델을 찾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몸이 잘 관리되고 포즈에 능숙한 사람이다. 특히 의료 촬영이나 공연의 단역 같은 일은 인지도와는 완전히 무관하다. 유명한 모델이라고 돈을 더 주지도 않고, 알려진 얼굴이라고 해서 임금을 깎지도 않는다. 누드모델이 유명해지면 쓸데없이 페이만 높아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거친 분류이기는 하지만 배우는 인지도가 높아질수록 커리어가 연장되는 것에 비해, 모델은 인지도가 쌓일수록 수명이 짧아진다. '얼굴 없는 비너스'라는 수식어는 모델로서는 일종의 자조적 표현이다.
 
인물화를 그리는 화가 선생님들이나 다양한 포즈를 배우고 싶어하는 크로키 교실에서는 아무래도 새로운 모델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자주 다녔던 화실에 또 불려가면, 수강생이 '또 같은 모델이 왔네요'라고 불만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모델마다 자신의 신체 특성과 선호하는 콘셉트가 있어 비슷한 포즈가 반복되기에, 배우는 사람으로서는 지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무용과 스포츠를 공부해 포즈를 발전시킬 수도 있지만, 애초에 계속 새로운 사람을 요구하는 모델 업계에서 그 정도까지 자기계발을 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 모델은 볼 때마다 다르네'는 엄청나게 기쁘고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칭찬이다.
 

스케치들 ⓒ 정규리

 

크로키 동호회의 1분 포즈 스케치 ⓒ 정규리


여성 모델이 사진 촬영에 민감한 또다른 이유는, 글을 읽는 분들이 짐작하다시피 성적인 위협이 발생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샤워 신 대역이라고 듣고 갔는데, 성관계 장면 연기를 요구받은 경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모델이 일을 거부하면, 장소 대관비, 장비 대여비를 변상하라고 하기도 한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내가 소속된 회사에서는 촬영 현장에 대표님이 항상 동행했다.

신체 접촉이 일어나는 경우도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포즈 지도'라는 명목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이지만, 돈을 더 준다고 해서 괜찮아지지도 않는 경험이다. 

인체를 표현하는 작가에게 필요한 것
 

조소과 인체크기 좌상의 제작 과정 ⓒ 정규리

 
석사논문을 쓰기 위해 모델들을 인터뷰 하다가, '우린 예술하는 사람이 아닌 거예요'라는 말을 하는 인터뷰이와 함께 울어버렸던 적이 있다. 우리가 예술가 본인은 아니더라도 예술의 언저리에는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했던 순간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예술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일회용 마네킹으로 취급받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안다. 그래서 '직업체험'이나 '르포기사' 따위가 아니라, 장기간 활동하는 전업 모델들은 보통 자신만의 원칙이 있다. 화가와 단 둘이 작업하는 1:1 수업은 아예 받지 않는 모델도 있고, 무대와 그리는 사람 사이의 거리가 2미터 이상 확보되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는 옷을 벗지 않는 모델도 있다.

나는 탈의실에 민감해서, 환복 공간이 전혀 준비되지 않아 상가 건물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했을 때는 정말 그대로 집에 오고 싶었다. 잠금 장치는 허술했고, 칸막이는 위아래가 휑 뚫려 있었다. 비위생적인 바닥에 옷이 떨어질까 봐 조심조심 움직였지만, 낡은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겨울바람 때문에 맨살에 소름이 돋았다. 한참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공중화장실 불법 촬영에 대한 걱정은 사치였다.

세상에는 돈으로만은 치유되지 않는 폭력이 존재한다. 돈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 해서,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하지는 않는다. 모델마다 그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미대 수업이나 크로키 동호회같은 일반적인 모델 일과는 다른 작업을 할 때는 계약서를 쓰는 것이 좋고, 계약서에 앞서 작가와 모델이 충분한 대화를 통해 경계를 조율하고 합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글을 쓰는 것은 내 작은 복수다. 인체를 표현하는 작가는 사람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먼저 배워야 할 것이다. 참여자를 존중하는 작업에 임할 때 모델은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며 최선을 다한다.

비좁을지언정 문이 달린 탈의실, 벌거벗은 모델이 추위에 떨지 않을 수 있는 실내온도, 천장 구석에 무심히 달린 CCTV를 가려주는 종이 등 아주 사소한 배려를 느낄 때 모델은 조금 힘들더라도 더 과감한 포즈를 취하고, 1분이라도 더 버티기 위해 이를 악문다. 한 명의 모델로부터 최선의 작품을 이끌어내는 것은 작가의 역량이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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