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22 06:03최종 업데이트 23.02.22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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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싱가포르의 한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1988년부터 반도체 일을 시작했으니 그동안 회사만 몇 번 바뀌었지 30년도 더 넘게 이 일을 하고 있네요. 더불어 <오마이뉴스> 창간 첫 해인 2000년부터 기사를 써 온 시민기자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쓴 기사가 700개가 넘습니다. <오마이뉴스>를 만난 이후 반은 회사원, 반은 시민기자의 모습으로 스무 해 넘게 산 것 같습니다.

'스물 셋, 오마이뉴스에 바란다'라는 주제로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오마이뉴스>의 역사를 함께해 온 시민기자로서 뭔가를 바라기보다는 시민기자로서 제가 기성언론의 직업기자들과 어떻게 다른 기사를 써 왔는지 이야기하는 게 좀 더 책임감 있는 태도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무 해 가까이 싱가포르에 살고 있다 보니 주로 싱가포르 소식을 제 나름대로 소화해서 기사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 언론이 싱가포르에 대해, 혹은 외국에 대해 어떤 식으로 기사를 쓰는지가 자꾸 눈에 들어옵니다.

해외 뉴스의 대부분은 보도자료 아니면 외신 번역
 

연합뉴스에서 싱가포르로 기사를 검색해서 나온 결과입니다. 기업이나 정부.지자체에서 내 놓은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한 기사들이 대부분입니다. ⓒ 연합뉴스 홈페이지

 
우선 기성언론의 해외뉴스를 보면 대부분 기업이나 정부 혹은 지자체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옮긴 기사들이 많습니다. <연합뉴스>에서 '싱가포르'로 기사 검색을 해 봤더니 위와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대부분의 기사 제목이 보도자료를 낸 기업이나 지자체의 이름으로 시작됩니다. 이렇게 패턴이 일정하니 앞으로 이런 류의 기사는 챗GPT가 쓰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보도자료 기사 말고 특파원 이름으로 나오는 다른 기사들은 대부분 현지 언론의 기사를 번역해서 소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사 첫 문장이 "외신에 따르면" 혹은 "스트레이츠 타임즈에 따르면"으로 시작되는 건 대부분 외신을 번역해서 소개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현지 사정을 모르고 외신을 번역해서 기사를 쓰다 보면 가끔 오보를 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일보>가 지난해 4월 보도한 "싱가포르 19년 만의 권력 교체… 리셴룽, 후임에 '4G 그룹' 로런스 웡 장관 낙점"이라는 기사를 보면 싱가포르 총리가 곧 바뀔 것처럼 보입니다. 제목에 "19년 만의 권력 교체"라고 확정적으로 보도를 했으니까요. <중앙일보>도 같은 내용을 보도하면서 "이로써 싱가포르 '국부(國父)'로 불리는 리콴유 전 총리의 장남인 리 총리는 2004년 취임한 이후 18년 만에 총리에서 물러나게 됐다"고 썼습니다.
 

"싱가포르 19년 만의 권력 교체"를 보도하는 한국일보 (왼쪽). 하지만 싱가포르의 권력은 해가 바뀐 지금도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같은 시기 전 한국언론의 오류를 지적하는 기사를 썼습니다. (오른쪽) ⓒ 한국일보 오마이뉴스 홈페이지

 
하지만 이는 싱가포르의 독특한 권력승계 제도를 모른 채 외신을 단순 번역하다가 발생한 오해입니다. 지난 4월에 기사가 나왔지만 해가 바뀐 지금도 싱가포르의 총리는 리셴룽입니다. 후계자가 지명은 됐지만 시기를 못 박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전에 후계자로 지명된 이가 총리로 취임하지 못한 전례로 봤을 때 실제 취임 전까진 앞으로 또 어떤 일이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외국에 살고 있는 시민기자인 저는 현지 언론을 보고 번역만 하면 되는 리셴룽의 후계자 낙점 소식 대신 그 소식을 전하는 한국 언론의 오류와 후계자 낙점이 가능한 싱가포르의 정치 제도에 대해 설명하는 기사를 썼습니다. 그게 시민기자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전 생각합니다(관련 기사 : "싱가포르 19년 만의 권력 교체"? 아직은 아닙니다 https://omn.kr/1yeep).

현지 실정을 잘 모르는 해외 특파원

특파원이 현지에서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쓰는 기사도 물론 많습니다. 하지만 특정 국가에 거주하면서 주변 국가의 소식을 두루 다루는 경우가 많아 현실과 동떨어진 기사가 나오기도 합니다.
  

싱가포르는 청렴한 관료 때문에 모기가 없다는 조선일보 특파원의 기사. 그의 말대로 모기가 없었으면 좋겠지만 실상은 매년 모기와의 전쟁으로 막대한 예산을 쓰고 있습니다. ⓒ 조선일보 홈페이지

 
예를 들면 방콕에 거주하는 <조선일보> 특파원이 쓴 "싱가포르 공무원 왜 대접받나"(2007년 보도)라는 기사 같은 겁니다. 조선일보 특파원은 "S건설 법인장"의 말을 인용해 "공무원들이 업자들의 집요한 설계 구조 변경 로비와 뇌물 공세를 물리치고, 모든 하수구의 경사를 물이 괴지 않게끔 절묘하게 조절해 만들었기 때문"에 싱가포르에 모기가 없다고 썼습니다.

하지만 싱가포르에 17년 넘게 살고 있는 저는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싱가포르 공무원이 청렴한 건 맞지만 싱가포르에는 모기가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지난해에는 모기가 전파하는 뎅기로 인한 환자가 코로나 환자보다 더 많아서 모기를 불임시키기 위한 유전자 조작 모기까지 만들어 내서 실험한 게 싱가포르의 현실입니다.

<조선일보>의 기사를 본 후 전 해당 기사의 오류와 함께 싱가포르가 모기를 상대하는 방법에 따로 기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물론 "S건설 법인장" 같은 취재원을 찾을 필요없이 제가 직접 경험한 모기에 대해 쓴 겁니다(관련 기사 : 깨끗한 관료 덕에 싱가포르엔 모기가 없다? http://bit.ly/11ZtXA).

정작 보도해야 할 내용에는 눈 감는 언론

보도자료를 베끼고, 현지 외신을 단순 번역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의 기사를 쓰는 언론이지만 정작 보도해야 할 만한 내용은 또 보도하지 않아 한국의 독자들의 눈을 가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2020년 7월, 싱가포르 일간지 <스트레이츠 타임즈>는 싱가포르 LTA (육상교통부)전 부국장이 120만4000싱가포르달러(약 10억3000만 원)의 뇌물수수 혐의로 체포됐는데 뇌물을 준 사람 여섯 명 중에 대우건설 소속 한국인이 2명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공무원의 청렴을 유독 강조하는 싱가포르에서 거액의 뇌물이 오간 사건은 큰 화제가 됐습니다.
 

대우건설의 간부가 싱가포르 관료에게 뇌물을 줬다가 걸려서 8개월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는 소식은 싱가포르에서 큰 뉴스였지만 이걸 보도하는 한국 언론은 거의 없었습니다. ⓒ 스트레이츠 타임즈 홈페이지

 
하지만 이 사건을 보도한 한국 언론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보다 일주일 전 대우건설이 싱가포르에서 2700억 원대의 도시철도 공사를 수주했다는 기사를 보도했던 <연합뉴스>도 <매일경제> <한국경제> 등 경제지들도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습니다.

싱가포르에서는 대우건설이 뇌물 사건으로 비판받고 있는데 한국의 독자들은 대우건설이 수주를 받으며 잘 나가고 있다고만 알게 되는 겁니다. 시민기자인 저는 대우건설의 수주 소식은 보도하지 않았지만 뇌물 사건은 있는 그대로 보도했습니다(관련 기사 : 싱가포르서 망신 당한 대우건설... 왜 한국언론은 조용할까 https://omn.kr/1re2m).

대우건설의 뇌물 사건에 대한 언론보도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닙니다. 한 인터넷 경제매체가 "도박 빠진 '그놈' 집요한 요구... 대우건설 싱가포르 뇌물사건 속사정"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담당공무원 도박 빚 갚기 위해 금품 요구"했고, "대우건설 거부했으나, 금품 요구 지속"되는 과정에서 "경쟁사가 먼저 제공, 어쩔 수 없이" 건넸다는 기사를 쓴 게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 매체들은 대기업에 이렇게 친절합니다.

해외 유력 언론의 한글 기사 서비스 vs. 해외 시민기자의 기사

요즘은 BBC를 비롯해서 한글로 뉴스를 발행하는 주요 외신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 언론의 오보와 의도된 가짜뉴스에 실망한 독자들이 외신에 눈을 돌리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런 해외 유력 언론의 보도는 그냥 믿고 볼 수 있을까요?

2020년 9월 BBC코리아는 "누명 쓴 가정부는 어떻게 싱가포르 백만장자와 싸워 이겼을까"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저 역시 비슷한 시기에 같은 사안을 <오마이뉴스>를 통해 소개했습니다.

싱가포르 최고위급 공직자가 자기 집에서 일하던 가사도우미에게 부당노동행위를 시킨 게 들통날까 봐 허위신고를 했는데, 재판을 통해 가사도우미가 이겼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싱가포르 고위공직자와 인도네시아에서 온 가사도우미와의 재판은 싱가포르 공직 사회에 큰 충격을 가져온 사건이었습니다.
 

BBC코리아의 기사 (왼쪽) 는 번역 과정의 문제였는지 숱한 오류를 품고 있었고, 그에 대한 지적을 받은 후에야 전면 수정되었습니다. 같은 사건에 대한 저의 보도. 기사를 번역한 게 아니라 판결문을 보고 쓴 거라 최소한 오류는 없습니다. ⓒ BBC, 오마이뉴스 홈페이지

 
BBC의 원래 보도는 문제가 없었는데 BBC코리아에서 한글로 번역하면서 사건의 주요한 사실들이 정반대로 설명이 됐습니다. 부당노동행위를 당해서 "여러 번 불만을 표했다"는 것을 "불평 없이 일했다"라고 번역하는가 하면, 증거로 채택된 물건이 공직자의 집에서 발견됐지만 BBC코리아는 인도네시아로 보내 버렸다고 썼습니다.

이밖에도 사실과 반대되거나 정확하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는 부분이 더 있어서 BBC코리아의 기사만 봤을 땐 이 사건이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가 어려웠습니다. 같은 사안에 대해 기사를 이미 써서 내용을 파악하고 있던 저는 BBC코리아 기사의 오류를 지적하는 기사를 썼고, BBC코리아는 얼마 뒤 해당 기사의 오류를 모두 수정했습니다(관련 기사 : BBC뉴스라고 해서 믿고 봤는데 실망입니다 https://omn.kr/1re32).

시민기자의 기사를 도용하는 언론

싱가포르에 살면서 현지 소식을 자주 기사로 쓰다 보니 기자들이 연락을 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 저의 경험이 기자들이 기사 쓰는 데 도움이 된다면 생업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언제든지 도울 생각이 있습니다. 가끔은 라디오 방송 인터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연락없이 제가 쓴 기사를 그대로 가져가서 본인이 취재한 것처럼 보도하는 기자들을 볼 때는 많이 아쉽습니다. 한국의 집값 문제와 관련해서 싱가포르의 토지임대부 공공아파트가 관심을 모을 때 관련 기사를 여럿 썼을 때의 일입니다.
 

반값 아파트가 한국에 바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주제의 기사(왼쪽)인데 제가 쓴 기사와 주제, 내용, 풀어가는 순서까지 거의 흡사한 기사(오른쪽)가 SBS를 통해 보도되었습니다. 날짜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시민기자가 방송 보도를 베꼈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 수준으로 두 기사는 닮았습니다. ⓒ 오마이뉴스, SBS 홈페이지

 
제 기사가 나간 다음날, SBS 기자가 제가 쓴 기사와 거의 유사한 내용의 보도를 하는 걸 봤습니다. 두 기사를 비교해 보면 최소한 다섯 문단 이상이 동일한 내용이며 기사를 풀어가는 순서마저도 동일했습니다. 기사의 출고 날짜를 자세히 비교해서 보지 않으면 시민기자인 제가 방송 보도를 보고 베껴서 기사를 썼다고 오해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독자들이 시민기자의 기사라고 하면 직업기자의 기사에 비해 낮춰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잘 아는 분야를 자기만의 시선으로 쓰는 시민기자의 기사는 직업기자의 그것과 비교해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보도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판단은 시민기자가 더 정확할 수도 있습니다. 정부든, 기업이든, 광고주든 눈치를 볼 상대가 없으니까요.

저 말고도 해외에 살면서 현지의 소식을 가감없이 전하는 시민기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 그 수가 좀 더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 미국·중국·일본 같이 기성언론을 통해서도 뉴스를 접할 수 있는 나라에 사는 시민기자는 기성언론과 다른 시각의 기사를 내놓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나 남미, 아프리카 등에 사는 시민기자는 평소 우리가 접하지 못하는 세계의 새로운 소식을 전해줄 수 있어서 좋을 겁니다.

23년 전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말에 끌려 시민기자를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시민은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시민"입니다. 머지 않아 외신이 즐겨 인용하는 <오마이뉴스>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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