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22 15:49최종 업데이트 23.02.22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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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와 기자. 2023년 현재 나의 두 정체성이다. ⓒ unsplash

 
교사와 기자. 2023년 현재 나의 두 정체성이다. 20년 넘도록 학교가 끝나면 기자가 돼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오마이뉴스>와의 인연 덕분이다.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강렬한 이 한 문장에 꽂혀 회원으로 가입했고, 이내 '시민 기자'라는 직함을 얻었다. 

2002년 11월 8일. 내 글이 처음 기사로 채택된 날이다. 그해 수능 감독을 마친 뒤의 단상을 푸념하듯 적어 송고한 걸로 기억한다(관련 기사 : 그들에게 수능은 무슨 의미인가). 교직 생활 5년 차로 매너리즘에 빠져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을 때여서, 첫 기사의 설렘과 흥분은 내 처진 어깨를 다독여준 고마운 치유제가 됐다.


그땐 주로 쓰기보다 읽었다. 다른 시민 기자들이 남긴 글에 공감이 되고 위로를 받았다. 그들 중엔 나와 같은 교사도 있었고, 인근에 사는 이웃도 더러 보여 반가웠다. 퇴근 후 <오마이뉴스>를 검색해 읽는 건 시나브로 루틴이 됐고,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조금씩 꿈틀거렸다.

비난과 조롱... <오마이뉴스>가 준 용기 
 

내가 오마이뉴스에 쓴 <'공짜' 참고서, 내년부터 받지 않으렵니다>(07.03.05) 기사. ⓒ 오마이뉴스 갈무리

 
사실상 시민 기자로서 글쓰기의 시작은 2006년 여름부터다. 그즈음 현직 교사의 삶과 고민을 글로 써서 다른 이들과 공유해야겠다는 다짐이 섰다. 내가 다른 시민 기자들의 글을 통해 힘과 용기를 얻었듯, 누군가 내 글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부대끼는 학교생활과 동료 교사들과의 일상이 글감이 됐다. 그들과의 행복했던 기억도 담아냈지만, 대개는 우리 교육의 그릇된 관행과 정책을 꼬집는 내용 위주였다. 상급 기관의 행태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충실한 취재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도 알게 됐다.

체벌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와 국가주의 교육의 관행, 우등생만 모아둔 특별반 운영과 '공짜' 참고서 문제 등 학교 내 민감한 문제들을 대놓고 '깠다'(관련 기사 : '공짜' 참고서, 내년부터 받지 않으렵니다). 다른 교사들로부터 비난도 받겠지만, 더 많은 누군가가 기꺼이 우군이 돼줄 거라 믿었다. 말 그대로, 거침없던 시절이었다.

대번 "그런다고 우리 교육이 달라질 것 같으냐"는 조롱이 쏟아졌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교사들의 무력감이 의외로 깊고 넓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멈칫하던 그때, 내게 용기를 주고 죽비가 돼준 게 바로 '2월22일상'이었다. 2008년 2월 22일을 결코 잊지 못하는 이유다.

그때부터 기사의 양이 부쩍 늘었다. 한 해에 얼추 60편 안팎이었다. 대충 환산하면, 일주일에 한 편꼴이다. 글감 삼아 주중에 보고 겪은 일을 메모해 모아두었다가 주말마다 한 편씩 써 내려갔다. 주말에 글을 쓰지 않으면 왠지 찜찜할 정도였다. 또 하나의 루틴이 추가된 셈이다.

글이 많아지다 보니 '선'을 넘기도 했다. 문제가 될 줄 뻔히 알면서도 일단 저지르고 보는 '근자감'이 어디서 생겨났는지 스스로 의아할 따름이다. 이명박 정권 당시 일제고사의 광풍이 몰아칠 때 출제와 감독을 거부했다가 학교로부터 징계를 받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2013년 6월 27일. 당시 국정원의 선거 개입과 보수 언론의 여론 조작, 일베의 난동 등을 규탄하며 교문에서 이틀 동안 1인 시위를 전개했다. '침묵은 악의 편'이라는 자극적인 글귀도 이어붙였다. 지켜본 동료 교사와 아이들, 학부모 대다수는 힘내라며 격려와 응원을 보냈다(관련 기사 : 교사 신분이지만 용기내 외쳤다... "이게 나라냐?").
 

지난 2013년 6월 27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피켓을 들고 교문 앞에 섰다. ⓒ 서부원

 
그러나 "그게 명색이 교사가 할 짓이냐"거나 "교사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한 범죄"라며 격렬히 항의하는 이도 있었다. 급기야 '빨갱이 교사'로 낙인찍히며 험한 꼴을 당해야만 했다. 수업 중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을 활용했다는 이유로 일베에 의해 간첩 신고를 당한 것이다(관련 기사 : 일베에 교사 고발하고 '전교조놀이'까지 박근혜 정부 5년 내내 이럴까 겁납니다).

간단한 소명 절차로 마무리됐지만, 공중파 방송의 9시 뉴스에 보도되는 '영광'을 누렸다. 주장의 사실 여부보다 1인 시위를 했다는 것과 이승만의 치부를 드러내는 등 교사로서 의무에 없는 행동을 했다는 게 빌미가 됐다. 교사는 그 어떤 정치적 의사 표시도 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곧장 글로 정리해서 황당함을 토로했고,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용기가 대단하다는 찬사 뒤로 시절이 하수상하니 조심하라는 조언도 줄을 이었다. 한바탕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갔지만, 학교는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홀로 뭇매를 맞고 만신창이가 됐건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반복되는 일상이 내심 서글프고 화났다. 그때도 날 위로해준 건 오직 <오마이뉴스>뿐이었다. 그해 첫 '올해의 뉴스 게릴라'로 선정됐다. 

'부끄러운 교사'가 되지 않기 위해 

2014년 4월 16일. 9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4.16이라는 숫자만 봐도 울컥할 만큼 세월호 참사는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직후 하루가 멀다 않고 글을 쓰고 또 썼다. 그것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달래는 일이자 유가족들과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한편, 세월호 참사는 교육 개혁조차 정치의 영역임을 깨닫는 소중한 계기가 됐다. 참사 수습 과정에서 총체적 부실이 드러났음에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기성세대가 적지 않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퇴행적인 정치 현실에 가슴을 쳤다. 이는 아이들이 희망이라는 점을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했다.

2016년 겨울, 그 뜨거웠던 광장에서 함께 촛불을 들었던 아이들의 모습은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나 역시 교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 위반을 내세워 을러대는 정부에 맞서 대통령 하야를 소리 높여 외쳤다. 적어도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교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촛불로 뭉친 시민의 힘은 딱 거기까지였다. 정치 권력만 교체되었을 뿐, 장삼이사의 강퍅한 삶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고, 천정부지로 오르는 집값만큼이나 시민들의 절망과 분노도 하늘을 찔렀다.

2019년 7월 30일. 성적 조작 비리에 연루된 인근 학교의 반교육적 행태를 고발한 글로 다시 한번 설화에 휘말렸다(관련 기사 : '나머지 학생들'은 버려? 비정한 어느 지역 명문고). 해당 학교의 교사는 물론, 학부모들까지 나서서 남의 학교 일에 참견하지 말라며 항의했다. 지역에서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며 대수롭지 않게 보는 눈치였다.

불의한 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교사와 학부모는 기꺼이 공범이 됐고, 아이들 다수도 어쩔 수 없다며 눈을 감았다. 그나마 그 학교에 다니는 한 아이의 '양심선언'만이 헛헛한 마음을 달래주었을 뿐이다.

2020년에 이어 2021년에도 내 글이 발단된 만만치 않은 필화 사건을 여럿 겪었다. 당시 문재인 정부를 비판한 지역 자영업자의 주장에 공개 편지를 써서 반론을 폈다가 쏟아지는 항의 전화로 며칠 동안 교무실의 업무가 마비되기도 했다. 그 자영업자도, 나도 반대 진영의 '좌표 찍기'로 곤욕을 치렀던 셈이다.

비슷한 시기, 정부의 지역 공공의대 설립과 의대 정원 확대 방침에 집단 파업으로 맞선 의사협회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예상치 못한 고통을 겪기도 했다. 전문의가 됐거나 최근 의대에 진학한 여러 제자와 척을 지는 일이 벌어졌다(관련 기사 : 의대생을 '괴물'로 키운 교사의 반성문). 높은 연봉과 사회적 대우가 열심히 공부한 대가라는 그들과 '공정'의 의미를 두고 전화로 열띤 토론을 벌였지만 허사였다.

한 명이라도 더 '의치한약'에 진학시키기 위해 애면글면하고 있는 학교의 현실이 겹치면서 그들을 가르친 교사로서 분노를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기실 의사협회를 향한 비판은 교사인 나의 참회록이었다. 최고의 기득권층이 된 그들의 전화번호를 지우면서, 교육의 본령이 뭔지를 새삼 성찰하게 됐다.

<오마이뉴스>가 아니었다면 

돌이켜 보면, <오마이뉴스>는 내게 늘 그랬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나타나 등을 토닥여주는 수호천사가 돼주었다. 내 시시콜콜한 생활 글도, 거칠고 무딘 주장 글도, 투정하듯 하소연하는 글도 너른 바다의 품처럼 모두 포용해주었다. <오마이뉴스>를 만나지 못했다면, 기자는커녕 교사로서의 내 삶도 각박한 현실에 찌들어 더 남루해졌을 게 뻔하다.

요즘엔 날 교사로서 만나는 이들보다 기자로 알은체하는 이들이 더 많아졌다. 사람들은 교직 경력을 묻기보다 글을 쓴 지 얼마나 됐는지를 궁금해하고, 메일을 통해 제보하는 경우마저 생겼다. 교재를 연구하다 말고, 부지불식간 기사를 쓰고 있는 모습에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교사가 되지 않았다면 애초 <오마이뉴스>를 만날 수 없었고, <오마이뉴스>가 아니었다면 지금 교사로 남아있지 못했을 거라는 점이다. '교육 전문 시민 기자'라는 영광스러운 직함을 아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교사가 되라는 편달로 여기며 오늘도 최선을 다할 뿐이다. 교사로서 내 열정의 팔 할은 <오마이뉴스>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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