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수준의 영어 단어를 눈앞에 두고 아이와 끙끙댈 때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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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 전공자였던 나는 다행히 언어를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맞았고, 언어를 어려워하지만 잘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 아이도 속도는 다소 느리지만 내 설명을 잘 이해하고 따라오고 있다. 실력이 조금씩 느는 모습을 보면 보람도 느낀다. 뭔가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재미도 생기는 법, 아이는 서서히 영어에 재미를 붙여가는 듯하다.
문제는 내 마음이다. 지금은 전업주부지만 결혼 전부터 몇 년 전까지 꾸준히 돈 버는 일을 해왔고 지금도 일을 해볼까 모색 중인 내 마음은 아이를 가르치면서도 온전히 아이에게 머물지 못한다.
이 시간에 나만의 자기계발을 해야 할 텐데. 인생 이모작을 계획하며 커리어를 쌓거나 적더라도 돈 버는 일을 해야 할 텐데. 중학교 1학년 수준의 영어 단어를 눈앞에 두고 아이와 끙끙댈 때가 아닌데.
지금이라도 당장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하면 되지 않나 생각도 해보지만, 정규직에서 프리랜서로, 프리랜서에서 전업주부로 점점 더 일을 줄이다 보니 새삼 느낀 건, 집에 있다 보면 점점 더 집에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밖에서 일할 때는 안 보이던 집안일이 눈에 더 많이 들어오고 직장에 다닌다면 어쩔 수 없이 사교육에 맡겼을 아이의 학업도 지금 당장 집에 있는 내가 여력이 되는 것은 해주며 비용도 아끼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매일 집을 챙기다 보면 나 없으면 누가 이 일을 하나 싶고, 이걸 방치하고 다른 직업을 구하는 것도, 그렇다고 집안일을 다른 이에게 맡기는 것도 아닐 말 같다. 마치 집 안에 있게 되는 상황에 가스라이팅 되는 느낌이랄까.
아이와 서로 안 맞아 "엄마한테는 죽어도 안 배워", "이제 너를 가르쳐주나 봐라!"라며 갈라서면 몰라도 '착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아이가 나와 하는 공부를 잘 따라와 주니 결국 내가 있을 곳은 여기인가, 싶어 집에서 할 일을 더 찾게 된다. 그렇게 점점 더 나는 집안일과 아이 교육에 '집며들어' 가고 있다.
결국은 아이를 가르치고 함께 시간을 보낼 거면서 반복해서 '내가 이럴 때가 아닌데'라며 붕 뜬 마음을 안고 생활하는 것이 내 정신 건강에도 안 좋은 것 같아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람 일은 마음먹기 달렸다고,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고쳐먹으면 불편한 심정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현재 상황의 좋은 점을 정리해 보자.
- 내가 아이를 가르치며 사교육비를 아낄 수 있다. 지금 당장 나가서 큰돈을 벌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비용을 아끼는 것도 결국은 돈 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함께 공부하며 관계가 나빠지지만 않는다면 아이의 실력을 지켜보며 앞으로의 학습에 도움을 줄 수 있다.
- 나만 의지가 있다면 아이와 함께 공부하며 내 영어 실력을 유지 혹은 향상시킬 수 있다. 단, 그러려면 이왕 할 거 나도 집중해서 열심히 해야 할 것 같다.
- 그리고 또...뭐가 있지...뭐가 좋은 점이지?
생각이 안 난다. 단 세 개에서 막혀버리다니. 역시 나는 지금의 상황을 마음에 안 들어하고 있었고 애써 좋게 생각해보려 한 것은 억지였다는, 내 솔직한 마음만 들켜버린 느낌이다. '생각하기 나름'이 언제나 유효한 것은 아닌가 보다.
나는 '아이 일보다 나 자신의 일이 더 중요하다', '부모가 아이에게서 적당히 멀어지는 것이 아이의 자기 주도성을 도와주는 것이다'라고 외치는 엄마였다. 마치 그런 생각이 대단한 교육 철학이라도 되는양 떠들어대곤 했다.
그런데 막상 아이가 공부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며 그렇다고 사교육의 손을 빌리려고 하지도 않는다. 결국 아이와 멀어지기는커녕 더 밀착해서 함께 있는 이 상황에 나 자신도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아이는 오는 3월부터 인가받은 대안형 사립학교에 다니게 된다. 그 학교는 사교육을 금지하는 대신, 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공부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신다. 그때가 되면 내 혼란도 좀 잦아들려나.
나답지 않게 헬리콥터맘(자녀의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며 자녀를 과잉보호하는 엄마를 가리키는 말)이 된 듯한 이 불편함이 해소되려나. 그렇게 해서 더 많은 내 시간과 자유를 얻게 되면 과연 나는 무엇을 하게 될까? 지금보다 더 보람 있는 '내 시간'을 갖게 될까?
가정은 이미 꾸렸고, 자식을 이미 낳아 놓은 이상 아이와 집안일에서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전업주부. 그 온전한 전업주부 생활 5년 차를 맞는데도, 그 생활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찾으려 발버둥치는 나는, 아직도 하루하루 적응되지 않은 감정에서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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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엄마가 있었다> 작가.
문화, 육아, 교육 분야의 잡지에서 기자로 일했다. 결혼 후 힘든 육아와 부모의 질병을 겪으며 돌봄과 나이듦에 관심 갖고 사회복지를 공부한다. 소중한 일상, 인생, 나이듦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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