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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도 즐겨본 정치 드라마, 최고의 장면

[김성호의 씨네만세 449] <웨스트 윙> 시즌6 에피소드13

23.02.16 11:43최종업데이트23.02.16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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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이후 최종면접자 자율피드백 의무화, 전기차 충전요금 5년 간 동결 등 일찌감치 내세운 공약들을 줄줄이 폐기했다. 취임 전 내세운 모든 공약을 이행할 수 있는 건 아니라지만 별다른 노력조차 엿보이지 않는 공약 폐기는 실망스럽다. 
 
흔히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이라고들 한다. 공공의 공 자 대신 헛될 공 자를 넣어, '정치인의 약속은 대개 헛되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이다. 가장 큰 잘못은 공약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자들에게 있지만, 책임 있는 자세로 공약을 검증하는 언론의 부재와 무관심한 국민들도 이유로 지목된다. 
 

▲ 웨스트 윙 시즌6 포스터 ⓒ NBC

 
노무현 대통령도 즐겨본 정치드라마
 
미국 대통령과 백악관 참모들의 이야기를 담아 미국 최고의 정치드라마란 평가까지 받은 <웨스트 윙>은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 시의적절한 메시지를 던진다. 노무현 대통령도 취임 초기부터 이 드라마를 즐겨 봤다고 한다. 
 
<웨스트 윙> 여섯 번째 시즌, 열 세 번째 에피소드는 정치인의 공약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여섯 번째 시즌은 민주당 바틀렛 대통령의 두 번째 재임기가 후반을 향해 치닫는 무렵이 배경이다. 차기 대통령을 노리는 유력 정치인들이 민주당과 공화당 대표로 선출되기 위해 경선을 벌이는 시기로, 백악관 참모 몇도 민주당 후보들의 캠프로 흩어져 저마다 지지하는 이를 당선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조쉬 라이먼(브래들리 휘트포드 분)이 있다. 부통령 출신 유력 정치인의 제안을 뿌리치고 전국적 명성이 없다시피 한 3선 하원의원을 선택한 그는 매 순간 현실의 벽에 부딪치며 선거전을 치러나간다. 가장 큰 적은 모시는 후보인 매튜 산토스(지미 스미츠 분)다. 정직하고 고지식한 그는 정도가 아닌 길을 좀처럼 걷지 못하는데, 그의 그런 태도가 선거전에서 거듭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조쉬는 매순간 그를 설득하려 하고, 산토스는 매번 제 생각을 고집하려 한다.
 

▲ 웨스트 윙 스틸컷 ⓒ NBC

 
옥수수 밭에서 옥수수를 부인하기
 
열 세 번째 에피소드는 미국 중부 아이오와 주 유세로 채워진다. 각 후보들은 아이오와 연설을 앞두고 발표할 공약에 고심을 거듭한다. 아이오와의 핵심 관심사는 너무나도 선명한데, 에탄올 에너지의 활용과 그 원료가 되는 옥수수 농업에 대한 보조금 문제가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오와는 옥수수 주(Corn State)라 불릴 만큼 옥수수 생산에 집중하는 곳이다. 

주에 도착하자마자 조쉬와 산토스는 설전을 벌인다. 이런저런 주문을 하는 조쉬에게 후보가 말한다.
 
"에탄올 문제는 헬렌 이야기가 맞아. 환경에 나쁘고 비용도 많이 들어. 골칫덩어리 정책이야."
"뉴햄프셔를 적으로 만들고도 그러세요?"
"수송도 불편하고 저장하기도 곤란하지."
"모욕주기 순회공연이라도 하세요? 노스다코타에 가선 사우스다코타 이름이 더 근사하다고 하실 건가요?"
"농업보조금 정책은 대공황 시기에 농민을 도우려고 시작됐어. 지금 시대엔 오히려 해만 된다고."
"적만 만들다가 가시려고 그래요?"
"보조금의 75%는 미국 농부 중 부유층 10%에게 가지. 정부가 매년 수백만 달러를 셰브론, 보험회사, NBA 선수들한테 주는 꼴이야."
"제 말 따라하세요. 가족농업은 가장 존중할 만한 생활방식이고 우린 그걸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웨스트 윙 스틸컷 ⓒ NBC

 
프롬프트에 쓰인 글
 
가고 싶은 길을 따라 대통령이 되는 것과, 어떻게든 대통령이 된 뒤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이야기가 끝도 없이 맞붙는다. 시민들은 진실에 관심이 없다는 책사의 이야기는 그가 지난 다섯 시즌 동안 보여준 진심이 담긴 행보 덕에 의심 받지 않는다. 적어도 보는 이들에겐 말이다. 그토록 뜻 있는 이조차 시민들 앞에선 거짓을 말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한다. 진실을 말해야 할 때와 거짓을 말해야 할 때가 따로 있다고 말이다.

후보는 매순간 저항한다. 그러나 이미 다른 주에서 몇 번이나 실패를 겪은 뒤다. 그럼에도 진실만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제 말을 부인할 수는 없다고, 알면서 시민에게 거짓을 말하는 지도자는 가치가 없다고 저항하려 한다.
 
민주당의 다른 후보들은 일찌감치 에탄올 산업을 지지하고 옥수수 농업에 보조금을 주겠다는 입장을 밝힌다. 유력한 어느 후보는 입장을 묻는 보좌진에게 "굳이 정치적으로 자살할 필요는 없지"라고 답하기까지 한다. 대규모 연설을 코앞에 두고 조쉬와 산토스는 격하게 대립한다. "대통령이 되면 정말 중요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라고 말하는 조쉬에게 산토스는 끝까지 그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단상에 오른 산토스는 주저 끝에 프롬프트에 쓰인 글씨를 결국 읽고 만다. 

"에탄올은 경제에 좋고 환경 친화적입니다. 에너지 정책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유세장 가득 환호가 터져 나온다. 무대 뒤에서 상기된 표정의 조쉬가 주먹을 쥐어 흔든다. 산토스의 아내는 자리를 돌아 나온다.
 

▲ 웨스트 윙 스틸컷 ⓒ NBC

 
가장 인상적인 건 에피소드 후반부다. 공화당 후보 아놀드 비닉(앨런 알다 분)과 산토스가 우연히 만난다. 비닉은 지지자들 앞에서까지 에탄올은 안 된다며 설득을 거듭한다. 끝없는 설득에 적잖은 지지자가 떠나간다. 그러나 그는 설득을 멈추지 않는다. 보좌진은 실망하지만 그는 굽히지 않는다. 굽히지 않은 비닉과 타협한 산토스가 나누는 짧은 대화는 이 에피소드의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 된다.

2023년 한국에서 뉴스를 볼 때마다 20년 가까이 된 이 드라마를 떠올리게 된다. 허무하게 폐기된 공약, 분노하지 않는 언론, 냉소하는 국민. 이 얼마나 참담한 일이란 말인가.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웨스트 윙 NBC 아론 소킨 윤석열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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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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