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키우는 강아지 복주. 3개월 무렵의 사진이다.
이선민
그 잠깐의 경험도 고립이라면 고립이라고, 이 시기를 지낸 후 나는 저마다의 사정으로 갇혀 사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 연민의 감정이 생겼다. 나는 부쩍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병원에 입원해 오래 외출을 못하는 환자들, 보행이 자유롭지 못한 교통약자들, 또 동물원이든 수족관이든 한평생 철창에 갇혀 사는 동물들의 처지가 남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겪는 것과 겪지 않은 것의 차이가 크다는 걸 익히 알았으나, 이 정도일 줄이야. 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묶여 지내는 모든 생명체의 심정에 공감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서울 외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 미터 목줄' 신세의 밭지킴이 개들에게 자꾸자꾸 마음이 간다. 아마도 내가 개를 키우고 있기 때문이리라. 요즘 건강이 좋지 않아 전보다 자주 병원 신세를 지는 탓에 최근엔 포천의 산골에 방 하나를 얻어 요양차 들어갔다. 산 좋고 물 좋은 데서 스트레스 안 받고 살아 보려는 요량으로 말이다. 한데 시골살이의 복병이 있었다. 일 미터 목줄에 묶여 사는 개들을 '천지삐까리'로 보는 것이다.
포천은 서울과 멀지 않은데 거리가 무색하리만치 서울과는 모든 게 다르다. 이 중 최고는 단연 날씨인데 11월에 내린 눈이 2월까지 녹지 않는다. 한겨울엔 네팔인지 포천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천지가 눈이다. 눈이 그토록 안 녹으니 바람은 어땠겠나. 칼바람은 그야말로 면도칼이다. 바람의 기세가 어찌나 매서운지 기상청에서 한파경보라도 발령하는 날엔 종일 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
이렇게 추운 날이면 개들도 나도 외출을 자제하고 종일 전기장판 위에서 뒹구는 데 그럴 때면 자꾸 이웃에 묶여 지내는 개들 걱정이 된다. 개집이라고 해봐야 몸 한 칸 간신히 눕힐 공간이고, 그마저도 엉성한 합판으로 짜여 있어 눈과 비만 겨우 피하는 실정이다.
개집에 깔린 건 홑껍데기 담요 한 장뿐인데 이 추위를 개들이 어찌 견디나, 밤사이 얼어 죽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자꾸 자다 말고 일어나 앉아 개들의 기척을 들으려고 귀를 열었다. 하루를 꼬박 기다려도 개 짖는 소리를 못 들을 때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가, 어느 틈엔가 다시 개 짖는 소리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럴 때마다 속으로 어떤 게 나은가를 헤아려 봤다. 먹지도 못하게 얼어 버린 물과 사료를 씹으며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견디며 사는 생이 이 친구들에게 좋은 건지, 아니면 얼른 죽어 더는 고통 없는 세상으로 떠나는 게 나은지. 알 수 있나, 개들의 심정을.
개의 주인과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그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시골에서 이렇게 개를 묶어 기르는 건 나름 다 생각이 있어' 이러는 거다. '개를 좋아해서 이렇게 기르는 거다, 애초에 개를 싫어했으면 개장수에게 팔았다'라고 한다. 사람이 남긴 밥을 먹이며 밖에서 묶어 놓고 기르는 게 왜 문제인지조차 모른다.
상황이 이러니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차라리 개를 싫어하면 낫겠다 싶다가도 아니지, 그럼 또 개장수에게 개를 팔 테니까 싶다. 이방인 처지의 내가 끼어들어서 갑자기 '그렇게 기르지 마시라'고 개 주인을 설득할 상황도 안 되는 거다. 그러니 이런 상황을 마주하면 좀 비겁하지만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을 수밖에 없다.
사랑한다며 벌어지는 폭력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