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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에 딱 10번, 이들이 밥다운 밥을 먹을 수 있는 날

먹거리 사각지대에 놓인 농촌 1인 노인가구... '잘 먹을 권리'를 위한 지역사회의 고민

등록 2023.02.25 11:55수정 2023.02.25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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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어울려 먹는 게 얼마나 좋아. 덜 적적하고." ⓒ 월간 옥이네

 
[이전기사] 밥에 김치 그리고 약... 외로운 밥상, 위태로운 농촌 https://omn.kr/22u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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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9일 안남면 연주리 마을회관에 모인 주민들이 먹은 것
쌀밥, 뼛국, 청국장, 땅콩멸치볶음, 김 무침, 김치, 소시지 구이, 그리고 함께 먹는 기쁨


오랜만에 안남면 연주리 마을회관 주방이 시끌벅적하다. 창가 가스레인지 위에선 뼛국과 청국장이 끓어오르고 맞은 편 빨간 밥솥은 하얀 김을 뿜으며 구수한 냄새를 퍼뜨린다. 싱크대 한편에 기대선 김정순(81)씨는 땅콩멸치볶음과 김치를 접시에 나눠 담느라 분주하다. 대한노인회가 지원하는 경로당 급식 도우미 활동이 재개된 지난 1월 19일 늦은 오후의 장면이다.

이날 점심을 먹은 후 일찌감치 마을회관을 찾은 염선순(82)씨는 오랜만에 둘러앉아 함께 수저를 뜰 생각에 괜히 신이 난다. 평소 약을 챙겨 먹느라 혼자서도 세 끼를 꼬박꼬박 잘 챙겨 먹는 그이지만 누구 말마따나 역시 '다른 사람이 차려주는 밥이 제일 맛있는' 걸까.

"그렇지, 우리야 뭐 누가 챙겨주는 게 제일 좋지(웃음). 아니, 꼭 그게 아니어도 같이 어울려 먹는 게 얼마나 좋아. 덜 적적하고. 젊은이들이야 알아서들 잘 먹겠지만 우리가 어디 그런가. 별거 없어도, 국 하나만 있어도 서로 챙겨주면 좋지."

대한노인회 지원 경로당 급식 도우미 활동은 월 10회 진행되지만 이 사업이 재개된 이번 1월에는 설 연휴 등으로 19일, 20일, 25일, 26일 4회만 실시됐다. 김정순씨와 함께 연주리 회관 급식 도우미로 활동하는 곽계환(86)씨는 코로나19 이후 오랜만에 함께 먹는 식사 준비에 절로 흥이 난다.

"평소에는 장(국), 시래기, 김, 김치 정도만 놓고 먹어. 오늘은 올해 처음 모이는 거라 뼛국에 청국장에 이것저것 꺼낸 거여."


그의 말처럼, 언뜻 보기에도 반찬 가짓수가 꽤 많다. 손바닥만 한 접시마다 땅콩멸치볶음, 고추부각, 김 무침과 소시지 구이까지 담겼다. 곽계환씨와 김정순씨가 집에서 따로 만들어 온 반찬들도 있다니, 이것만 봐도 '함께 먹는 밥'을 향한 그간의 그리움, 재개된 '함께 먹는 밥상'에 대한 반가움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아쉬움도 있다. 월 10회로 제한된 급식 지원이라는 점이다.

"이건 한 달에 열흘 하고 나면 끝이니까. 나머지 날들도 같이 먹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요. 혼자 있으면 솔직히 굳이 뭐 하러 챙겨먹나 싶거든? 근데 같이 있으면 '저 사람도 먹을 거니 더 챙기자' 싶은 마음이 생긴단 말이여. 하루 한 끼라도 그렇게 해먹으면 얼마나 좋겠어."

급식 도우미 김정순씨가 한 가지 바람을 전하곤 다시 주방으로 향한다. 그사이 다른 주민들이 상을 펴고 반찬 그릇을 나르며 어느새 푸짐한 한 상을 뚝딱 차려낸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밥과 국을 놓고 둘러앉은 밥상 위로 조용한 수저질과 잔잔한 말소리가 오간다.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한 저녁의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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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안남면 연주리 마을회관 주방이 시끌벅적하다. ⓒ 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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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감치 '먹거리 복지'를 외쳐온 옥천 역시 이 같은 공동체 식당의 필요성을 계속 논의해오며 실현을 위한 기반을 닦아가는 중이다. ⓒ 월간 옥이네

 
#누구나 평등한 밥상을 향해

불규칙한 식사, 이로 인한 낮은 식생활 만족도는 연령과 지역, 성별을 막론한 1인 가구 공통 특성이다. '혼밥'이니 '혼술'이니 하는 '나홀로족'의 생활양식을 이르는 단어가 더 이상 낯설지 않을 만큼 1인 가구 증가 역시 가파르고 이를 겨냥한 다양한 상품과 화려한 마케팅이 쏟아지면서 혼자 사는 것이 그리 불편하지만은 않은 지도 오래.

그러나 어디에 사는지, 경제적 여유가 있는지에 따라 그 모습은 제각각 천차만별이다. 그중에서도 농촌 1인 노인 가구 상황은 특히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빈부격차 심화, 고령화로 인한 활동력 감소, 양질의 식재료에 대한 접근성 부족 등으로 먹거리 사각지대에 놓일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동 지역(도시) 거주 노인보다 읍면 지역(농촌) 노인의 영양섭취가 더 부족하다. 옥천 홀몸노인의 식생활 관련 실태조사가 실시된 적은 없지만 지역 상황 역시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지역 노인들의 우울감 등 정신건강이 염려할 수준이라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이는 시급한 대책이 필요한 부분이다. 2019년과 2020년 옥천군보건소가 실시한 '독거노인 정신건강 상태 조사'에 따르면 홀몸노인 중 우울감을 느끼는 이가 5명 중 1명, 자살을 생각하는 이는 4명 중 1명꼴로 나타났다. 고혈압, 당뇨, 암, 관절염 등의 신체 질환을 갖고 있는 노인은 10명 중 8명 이상(86.1%, 1816명)으로 더욱 심각하다.

이 중에서도 기초생활수급 또는 차상위계층이 16.2%(239명)를 차지한다는 점 역시 눈여겨봐야 한다. 대부분의 홀몸 노인에게 신체적 어려움은 일상이며, 여기에 정신적·경제적 문제까지 삼중고에 처한 경우가 결코 적지 않은 것. 홀몸노인의 '혼밥'은 이 같은 상황을 더욱 악화일로로 접어들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역 공동체가 함께 풀어야 할 사회 문제다.

지역 노인을 위한 함께 먹는 밥상, 즉 공동체 식당(공유부엌, 커뮤니티 식당, 마을 공동 급식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이 화두가 되는 배경이다. 앞서 만나본 지역 노인들이 '혼밥'으로 인한 어려움을 토로할 때, 단순한 '배고픔'이 아닌 '외로움'·'정서적 유대에 대한 갈증'을 내비치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찌감치 '먹거리 복지'를 외쳐온 옥천 역시 이 같은 공동체 식당의 필요성을 계속 논의해오며 실현을 위한 기반을 닦아가는 중이다. 지역 주민의 먹거리 주권 회복을 위한 옥천 푸드플랜(먹거리 복지 계획), 같은 목적을 갖고 실행되고 있는 신활력플러스 사업 등은 공동체 식당의 출현을 하루라도 빨리 앞당길 수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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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군 취약계층 대상 먹거리 지원 정책 ⓒ 월간 옥이네

 
물론 먹거리 복지의 범위를 계속 넓혀가야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주로 저소득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시행되며 '시혜성'이 강한 지역 먹거리 지원 정책을 '지역 주민이라면 누구나 평등하게 누릴' 권리로 확장하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것. 즉 홀몸노인 등의 식사 문제 해결은 단순히 취약계층만의 일이 아니며 지역 맞춤형 복지 체계 수립인 동시에 주민 모두의 건강권 보장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친환경 지역 농산물을 소비하고 먹거리 주권의 기반이 되는 농업 선순환을 가져온다는 점에서도 무척 중요하다.

이런 고민을 바탕으로 마을이, 개인이, 또는 모임이 '함께 먹는 밥', '나누는 밥상'을 고민하며 앞선 실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어지는 지면에서는 옥천 곳곳의 공동체 식당 이야기를 담는다. 마을 어르신들을 걱정해 주민들이 함께 만든 식당, 종교의 사회적 실천을 고민하며 문을 연 공유냉장고, 개인의 사업장에서 나누는 소소한 한 끼, 그리고 이런 활동을 공적 지원을 통한 정책화로 풀어가려는 노력이 깃든 현장들이다. 

월간 옥이네 통권 68호 (2023년 2월호)
글·사진 박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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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 #옥천 #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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