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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전 외규장각 의궤를 안아본 사람입니다

서울에서 재회한 '파리의 연인'... '외규장각 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 특별전 3월 19일까지

등록 2023.02.23 10:43수정 2023.03.03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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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전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 만났던 나의 연인이 있다. 이번에 서울에서 다시 만난 그 연인은 다름 아닌 외규장각의궤이다. 의궤란 왕실과 국가의 중요 행사에 관한 기록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2009년 여름 파리의 유서 깊은 리슐리에국립도서관에서 직접 안아보고 넘겨보았던 바로 그 고귀한 서적들을 한국 땅에서 다시 만나니 잔잔한 감회가 밀려왔다. 서적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때는 약탈당해 이역만리에서 '피랍자' 신세로 지내다 고국에서 면회 온 필자를 만났는데, 이번엔 고국에 돌아와서 필자를 다시 만난 것이니 서적들도 혼이 있다면 어찌 반갑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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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전 프랑스 리슐리에국립도서관에서 반환되기 전 외규장각의궤를 안고 다소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필자. 이번에 서울에서 다시 만난 이 멋진 '파리의 연인'과의 데이트는 한결 마음 편하게 이루어졌다. ⓒ 유종필

 
이 서적들은 병인양요(1866년) 때 강화도를 침공한 프랑스 군함에 약탈당한 사실만 전해올 뿐 정확한 행방을 모르던 중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1929~2011) 박사에 의해 발견되어 우여곡절 끝에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서적들로 인해 지금 우리나라의 고속철이 프랑스산 TGV(떼제베)이다.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 걸까.


이 서적들이 1975년 존재를 드러낸 이래 반환 문제가 한동안 한불 외교 현안이 되었다. 그러던 중 우리나라가 고속철을 도입하기로 한 1993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TGV를 팔기 위해 방한했다. 이때 외규장각 의궤 297 책의 반환을 약속하고 그중 맛보기로 <휘경원원소도감의궤>라는 책 한 권을 가져왔는데, 국립도서관의 여성 사서 2명이 책을 가지고 따라왔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청와대에서 두 나라의 대통령이 직접 반환식을 하기로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자 사서들이 책을 못 내놓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프랑스 측에 초비상이 걸렸던 것이다.

외무장관이 장시간 면담 끝에 전달식 몇 분 전에야 사서가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나타나 마지못해 책을 내놓은 해프닝이 발생했다. 사서들은 귀국 후 책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지겠다며 사표를 내는 초강수를 두었고, 프랑스 언론들은 대통령을 비판하고 사서들을 지지했다.

그 결과 프랑스는 TGV는 팔고 의궤 반환 약속은 지키지 않아 한국 측의 원망을 샀다. 그 후 숱한 양국 교섭 끝에 145년 만인 2011년 프랑스 국내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영구대여 형식을 빌어 사실상 한국에 반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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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왕의 결혼식 행렬 장면이 천연색 사진처럼 실감나게 펼쳐지고 있다. ⓒ 유종필

 
국립중앙박물관은 '외규장각 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 특별전을 3월 19일까지 열고 있다. 의궤 가운데 임금에게 올리는 어람용(御覽用)은 녹색 비단 표지와 놋쇠 변철, 최고급 초주지(닥나무 종이) 등 최상의 품질과 고귀한 멋을 뽐낸다. 반듯한 글씨체에 인물과 기물을 정교하게 묘사한 후 화려한 채색을 했다.

행사의 목적과 의의, 진행 과정, 참여 인물은 물론 행차 모습, 연주된 악기, 음식 등 물품들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소요비용과 일꾼들의 품삯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가히 조선 기록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조선왕실 의궤에는 예법으로 바른 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조선의 의례 경험과 통치 철학이 담겨 있다.


'파리에서 돌아온 나의 연인'은 고국의 품에서 한층 품위 있는 멋과 향취를 내뿜고 있었고, 나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연인과의 데이트를 즐겼다.
덧붙이는 글 <세계도서관기행> 작가. 전 국회도서관장
#외규장각의궤 #리슐리에도서관 #국립중앙박물관 #유네스코기록문화유산 #파리의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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