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모에 그려진 태극기 숨겨서라도 간절히 비는 마음 대한독립
대한불교조계종
국내에서 태극기 연구가로 알려진 송명호(전 문화재청 근대문화재분과 전문위원) 전 위원은 21일 열린 '지장시왕도' 관련 기자회견에서 "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한 '지장시왕도'에 태극문양은 확인 한 적이 있으나 불화에서 태극문양과 4개의 괘가 모두 그려진 태극기 그림이 발견된 것은 최초로 보인다"며 "태극기가 그려진 곳은 변성대왕으로 추정되는 이의 관모 위로 태극문양을 청색이 아닌 옅은 뇌록색으로 그린 것도 눈에 잘 띄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했다.
이 '지장시왕도'가 그려진 때는 탱화의 하단에 적어 놓은 그림에 대한 기록인 화기를 통해 알 수 있는데, 1917년(다이쇼 6년)으로 형식적으로는 포교의 보호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구속하고 통제하던 무단통치의 시기였다. 이에 따라 1912년 일장기를 보급하고 기념일에는 일장기를 걸도록 하는 칙령 19호를 선포했고 1915년 조선총독부령 제83호 <포교규칙> 등이 공포되기도 했다.
이번 '지장시왕도'에 그려진 태극기는 칼과 총이 드리운 엄혹한 시대에도 항일의 의지는 사그라들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탱화의 제작 과정을 주관한 진응스님의 흔적을 찾아 보도한 <불교신문>을 보면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의 불교를 일본 조동종에 병합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이를 막기 위해 광주 증심사에서 승려대회를 개최하고 이후 순천 송광사에서 임제종을 세우기로 결의하는 등 당시 조선의 불교를 지키고자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숨겨서라도 독립에 대한 간절함을 담아냈던 한 장의 후불탱화에서 총과 칼을 앞세워 대한제국을 없애려고 했던 일제에 맞서 이 땅의 역사와 정신을 지키고자 했던 이들을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일제가 그렇게 일장기를 내걸며 지우려 했던 태극기가 사라지지 않고 이후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에서 독립의 염원이 담겨 펄럭였다. 나라를 지키고자 한 마음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음을 잊지 않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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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화서 최초 발견된 작은 태극기, 간절했던 "대한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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