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결과적으로 대통령실이 '거부권' 언급을 남발할수록, 거부권의 중량감은 떨어지고 정치적 함의는 옅어진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지난해 9월, "칼은 칼집에 있을 때 위력이 있고, 칼을 꺼내서 휘두르면 효과가 떨어진다"라며 민주당의 장관 해임 건의안 발의를 비판한 바 있다. "해임건의안을 전가보도처럼 휘두르면 국민들의 피로감만 높아지고 자칫 잘못하면 해임 건의가 희화화가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라는 것. 국회의 고유 권한인 해임건의안에 대해서 '남용하면 안 된다'라고 지적했던 여당의 논리가 '대통령 거부권'에는 적용되지 않는 셈이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국회로 되돌려 보낸 법안이, 국회에서 재의를 거쳐 가결된 사례는 헌정사상 아직 한 번도 없다. 재적의원 과반 출석에 3분의 2 이상 찬성표가 나와야만 통과된다는 '조건' 때문이기도 하지만, 행정부의 견제 권한을 입법부가 그간 존중해 온 영향도 있다. 그러나 이처럼 거부권이 '희화화'된다면, 헌정 사상 첫 사례가 이번 국회에서 생기지 말란 법이 없다.
169석의 민주당이 무소속 친민주당 성향 의원들, 기본소득당 같은 위성정당 소속 의원들, 그리고 정의당과 손잡는다면 '3분의 2' 벽을 넘을 수 있다. 국회가 재의한 법안은 대통령이 거부할 수 없다. 15일 이내에 대통령이 공포하지 않으면, 국회의장이 직권으로 공포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일단락되는 게 아니다. 다음 총선까지 쟁점 법안들마다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며 국민의 피로감이 커지고, 정치가 실종된 자리를 혐오가 채우게 되는 게 더 큰 문제이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 소장은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양극화되면서 퇴행하는 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라며 "양측이 자신들의 지지층만 바라보는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민주당은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가 가시화한 상황에서 한가하게 국민의힘과 협상을 진행할 생각이 없고, 국민의힘은 윤석열 대통령의 '친정 체제'가 강화되면서 용산과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된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그는 특히 "과거 DJ나 YS 같은 전임 대통령들 같은 경우, 여야 경색 국면에서 타협안을 만들어 내거나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런 모습이 실종됐다"라며 "국무회의에 안건이 올라오지도 않았는데 재의 요구를 운운하고, 거부권 행사를 시사하는 뉘앙스를 계속 풍기는 건 사실상 국민의 대표인 국회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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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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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권 초라하게 만드는 대통령..."민주주의 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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