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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소설 시즌2'라며 비웃는데... '1타강사' 말에 귀를 의심하다

[주장] 우리 교육에 대한 신뢰 실추시킨 학교생활기록부... '대입 올인' 교육, 정상일까

등록 2023.02.27 11:43수정 2023.02.27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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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지난해 11월 17일 오전 한 수험생이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 이희훈

 
2월 말, 전국의 학교마다 개학 준비로 분주하다. 아이들은 반 편성 결과를 받아들고 설렘 반 긴장 반 상기된 얼굴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한다. 교사들 역시 전입과 전출이 이어지고, 이른바 '한 해 농사'를 결정짓는 업무분장이 뒤따른다. 아이들도 교사도 1년 중 가장 바쁜 시기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고등학교에는 개학 준비를 위한 연례행사가 하나 생겨났다.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학교생활기록부(생기부) 기재 연수'가 그것이다. 학교마다 시기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실시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입 전문가들이 가장 바쁜 때라는 뜻이기도 하다.

며칠 전 서울의 한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1타 강사'가 우리 학교를 찾았다. 근래 여러 권의 대학 입시 관련 서적을 출간한 내로라하는 대입 전문가다. 유수의 대학 입학 사정관에 대한 광범한 인맥과 오랜 진학 지도 경험을 소개하는 것으로 2시간짜리 연수를 시작했다.
 
"어떤 생기부가 좋은 생기부일까요?"
"평가자에게 임팩트있게 다가와야 좋은 것이겠죠."
"그럼 어떻게 작성해야 임팩트있는 생기부가 될까요?"
"남들과 차별화된 탐구 역량이 근거와 함께 잘 드러나도록 작성해야 합니다."
 

그는 자문자답하며 연신 강조했지만, 기실 이를 모르는 교사는 없다. 하도 자주 들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다. 지식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지식의 활용 능력이 서술되어야 한다는 것과 독서 역량이 교과 세부능력 특기사항 등에 드러나야 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대입 일타강사의 목소리가 커질 수록 헛헛해졌다

그는 생기부에도 아이들의 수준에 따라 일정한 패턴이 있다고 했다. 각 대학의 입학 관련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면서, 최상위권과 상위권, 중하위권 대학 합격생들의 생기부를 서로 비교해 보여주었다. 각각 특목고와 자사고, 일반고 생기부의 차이로 보면 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생기부의 영역별, 교과별 기재 내용을 첨삭 지도하듯 문제점과 보완점을 일일이 지적했다. 그의 확신에 찬 설명을 들으면 '나쁜' 생기부와 '좋은' 생기부가 명확하게 갈렸다. 예시로 든 '나쁜' 생기부로는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 진학은 어림도 없다며 잘라 말했다.

전가의 보도처럼 생기부로 내신 등급을 뒤집은 성공 사례를 공유하는 걸로 연수가 마무리됐다. 그래봐야 최소 3등급 이내의 소수 상위권 아이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일 뿐, 나머지 대다수에겐 다른 나라 이야기다. 아무튼 '좋은' 생기부를 쓸 줄 알아야 '좋은' 교사라는 거다.


그는 족집게 정보를 하나라도 빠뜨릴세라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말했다. 눈을 감고 듣는다면 흡사 1.5배속 스피커처럼 느껴졌을 것 같다. 그에게 누일지 찬사일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지만, 그의 별명이 '걸어 다니는 대학 입시 빅데이터'라는 걸 어디선가 읽은 적 있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마음이 헛헛해졌다. 마치 사교육의 입시설명회장의 학부모가 된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선 생기부를 활용한 대입 전략만 언급될 뿐, 흔들리는 공교육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교육의 본령과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교사 대 교사로서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강의를 마치고 귀경을 서두르는 그의 시간을 뺏을 순 없었다. 그보다 질의응답이 아니라 평행선을 긋는 토론이 될 게 뻔하다는 생각에 지레 포기했다는 게 맞겠다. 그가 듣는다면 불쾌할 테지만, 더는 이런 연수를 듣고 싶지 않다.

졸업 후 50년간 생기부 보관하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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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14일 앞둔 2022년 11월 3일 한 학원에서 수험생들이 자습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연수 내내 그가 자문자답했듯, 나 역시 여기에 반론 삼아 자문자답해볼까 한다. 이 글을 대입 전문가인 그가 읽는다면 세상 물정 모르는 치기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를 비롯해 지금 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교사들과 생기부에 대한 생각을 나눠보고 싶은 바람이다.

우선, 평가자의 마음에 들도록 작성해야 한다는 조언은 어느 정도 '마사지'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읽힌다. 대학이 '갑'이고 고등학교가 '을'인 현실을 거부할 수 없다는 거다. 어차피 생기부는 대입 전형자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자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실 생기부는 아이들의 고등학교 3년 생활에 대한 학급과 교과 담임교사의 꼼꼼한 관찰 기록이어야 한다. 졸업 후 50년 동안 생기부를 보관하라 규정해놓은 이유다. 대학의 눈치를 봐가며 아이들을 죄다 '성인군자'나 '인재'로 포장하려 드는 건 교사로서 죄를 짓는 일이다.

자소서가 폐지된 이상, 생기부가 그 역할도 감당해야 한다는 말에는 귀를 의심했다. 자소서는 대필이 만연한 데다 과장과 미화가 심하다는 여론의 비난에 휩싸여 이태 전 공식 폐지됐다. 당시 아이들조차 친구의 것과 서로 대조하며 '자소설'이라며 비아냥거리기 일쑤였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아이들 사이에선 이젠 생기부를 두고도 '자소설 시즌2'라며 키득거리고 있다. 온존한 학벌 구조 속에서 생기부가 학교마다 교육의 '목표'가 되면서 생겨난 부작용이다. 생기부의 중요성이 강조될수록 '자소설'이 될 가능성 역시 커지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생기부가 변별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순간부터 '자소설'이 될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장은 생기부의 '힘'을 빼는 것으로 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다른 학교는 다 하는데 우리만 안 할 순 없다는 강박관념과 무기력에서 교사들 스스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한 아이의 '좋은' 생기부가 그의 '좋은' 습관과 행동을 보증하진 못한다. 수능이나 내신 성적도 마찬가지다. 도덕 점수가 높다고 도덕적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치다. 수능 위주의 대입이 고등학교 교실을 황폐화했다면, '자소설' 생기부는 우리 교육에 대한 신뢰를 실추시켰다.

언제까지 교육이 대입에 노예처럼 종속돼야 하나

학교마다 생기부 기재 연수에 매달리며 '발등에 떨어진 불'로 표현한다. 어차피 대입이 인문계고등학교의 존재 이유 아니냐는 뜻이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우리 교육 앞에 시급히 해결해야 할 중요한 사안들이 부지기수인데, 허구한 날 대입만 가지고 애면글면해야 하는지 안타깝다.

경제적 양극화에 따른 교육 기회의 양극화, 아이들 사이의 광범한 물질만능주의,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을 당연시하는 비뚤어진 공정관, 공교육을 불신하고 사교육에 의존하는 문화 등 우리 교육이 풀어야 할 난제들을 뒤로 미뤄놓고 대입에만 '올인'하는 학교가 과연 정상일까 싶다.

개학을 앞두고 교사들이 한데 모여 학벌 구조를 혁파하는 방안 등을 주제로 토론하는 모습이 훨씬 더 학교답다.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조롱받을지언정, 들으면서도 찜찜한 생기부 기재 연수보다 백 번은 더 교육적이다. 대체 언제까지 교육이 대입에 노예처럼 종속되어야만 하나.

사족. 수능이 대치동 중심의 강남 학원가 '1타 강사'들에게 노다지가 됐듯, 생기부는 대입 전문가를 자칭하는 또 다른 '1타 강사'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듯하다. 언젠가 "권력만 시장에 넘어간 게 아니라, 교육도 이미 시장에 넘어갔다"던 한 아이의 우스갯소리가 새삼 떠오른다.
#학교생활기록부 #학생부종합전형 #학벌 구조 혁파 #수능 #자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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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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