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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귀환하지 못한 기구한 운명의 의궤 한 권

영국에서 '기사진표리진찬의궤'를 만난 추억을 소환하다

등록 2023.02.24 14:23수정 2023.03.03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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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1866년) 때 프랑스 군함에 약탈당했다 우리나라에 반환된 297 책의 외규장각 의궤와 달리 홀로 떨어져 아직도 이역만리 타향살이 중인 한 권의 의궤가 있으니 이것이 '기사진표리진찬의궤(己巳進表裏進饌儀軌)'이다. 순조가 할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경궁 경춘전에서 열었던 잔치에 관한 기록이다.

지금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외규장각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 특별전을 둘러보던 필자는 이 기구하고도 귀한 책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더구나 다른 의궤들과 달리 손으로 만질 수 있게 전시되어 있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소장자인 대영도서관의 협조를 받아 거의 비슷하게 만든 복제품이었다. 이 복제품 의궤는 필자가 2009년 대영도서관을 방문했을 때 만났던 기사진표리진찬의궤의 추억을 소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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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진표리진찬의궤' 복제본(국립중앙박물관 전시) ⓒ 유종필

 
당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수많은 외규장각의궤를 열람 신청해서 보고 대영도서관에 갔을 때 도서관 측은 뜻밖의 의궤 한 권을 내놓았다. 당시 필자는 프랑스에 약탈당한 의궤는 알았지만 영국에도 조선왕조 의궤가 있는 줄은 몰랐기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영도서관 측에 소장 경로를 물었더니 1891년(피탈 25년 후) 파리의 한 치즈상점에서 10파운드(한화 약 2만 원)에 구입한 것이라고 한다. 책장을 넘겨보면서 또 한 번 놀랐다.

프랑스에 있는 의궤들과는 차원이 다른 아름답고 다채로운 도화(圖畫)가 수십 장이나 들어 있었다. 당시 임금 내외와 임금의 할머니, 신하들과 궁녀, 악공 등 각급 복식(服飾)은 물론 잔치의 대형과 다양한 궁정 악기의 모습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혜경궁이 참석자들에게 꽃 한 송이씩을 하사했다는 사실, 그리고 꽃의 모양을 종류별로 그려놓았다. 한 마디로 최상품 의궤라 평가할 만하다. 더욱이 이 의궤는 단 한 권만 있기에 더욱 가치가 있다(다른 의궤들은 '같은 내용 다른 품질'의 책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왕과 세자, 신하 등 바치는 대상에 따른 격차 때문).

추측컨대 영국에 있었기에 반환 대상으로 거론도 되지 않았고, 지금까지 고국에 귀환도 못한 운명이 된 것이다. 이 책은 일종의 장물(贓物)이므로 반환 대상이 된다. 이제 영국에 반환 요구를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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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진표리진찬의궤의 도화를 바탕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의 장면 ⓒ 유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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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가 할머니인 혜경궁 홍씨에게 큰절을 두 자리 올리는 애니메이션의 장면 ⓒ 유종필

 
일반 대중에게 이번 특별전의 하이라이트는 맨 마지막에 있다. 기사진표리진찬의궤의 도화를 바탕으로 궁중 잔치의 모습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여 상영하는데, 궁중음악과 더불어 실감난 잔치의 모습이 절로 흥을 돋운다.


임금이 살아 있는 할머니에게 큰절을 두 자리 올리는 것이 이채로웠다. 특히 외국인들이 여럿 보고 있었는데 슬쩍 훔쳐보니 흥미로운 표정들이었다. 주최 측의 아이디어와 성의가 돋보인다.
덧붙이는 글 <세계도서관기행> 작가. 전 국회도서관장
#외규장각의궤 #기사진표리진찬의궤 #국립중앙박물관 #대영도서관 #의궤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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