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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 땅을 갈아엎는 봄의 전위대

[그림에세이] 일바지와 호미와 목장갑

등록 2023.03.02 22:02수정 2023.03.02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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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청춘인 줄 알았는데 이순이 넘어 할아버지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나이 들어간다는 것을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그 나이가 되어야만 아는 것들이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꼰대스럽지 않게 그림과 함께 풀어볼 생각입니다.[기자말]
'몸빼바지'라 불리는 일바지의 유래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 때라고 합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의 민중들을 조금이라도 더 착취하려고, 강제노역에 동원할 요량으로, 작업복으로 '몸빼'를 입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바지는 화사한 무늬만 빼면 한복 안에 입던 속곳과 비슷합니다. 여성들 입장에서는 속곳만 입고 다니는 것 같으니 당연히 수치스러웠을 것입니다. 당연히 거부했고 반대했겠지요. 그렇다고 그냥 둘 제국주의자들이 아니죠.


일바지를 입지 않으면 관공서 출입을 금지하고, 이런저런 불편함을 감내할 수밖에 없도록 합니다. 식민지 백성이라 힘도 없으니 입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입다보니 익숙해졌고, 일상에서 몸을 많이 움직이는 일을 해야하는 분들에게는 안성맞춤이었을 것입니다.

일바지는 농어촌 아낙의 옷이 되었습니다. 시장에 가면 단 돈 만 원, 오일장에 가면 오천 원에도 살 수 있으니 값도 부담이 없습니다. 화사한 천의 문양은 그것이 그것 같지만, 저마다 심사숙고하며 고릅니다.

잔칫집이나 특별한 외출을 하지 않을 때에 일상적으로 입는 옷, 그래서 저는 이 옷을 농촌 아낙의 옷이요, 어머니의 옷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공사판에 가보면 남자들도 입긴 입습니다만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닙니다.

저도 밭일을 할 때, 한번 입어봤는데 여간 편안한 게 아닙니다. 여름에는 천이 얇아 시원하기도 하고, 빨래도 쉽고, 빨리 마릅니다. 시작은 비록 일제강점기로부터 되었지만, 이제 그냥 우리 옷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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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바지와 호미 일바지의 무늬가 화사하고, 호미는 뭉툭하니 닳았다. 월간지 <전라도닷컴>의 사진을 참고하여 그렸다. ⓒ 김민수

 
입춘이 지나자 어머니들이 일바지를 입고 들로 밭으로 바다로 나가십니다. 한겨울을 한 데서 온 몸을 땅에 붙이고(로제트형) 자란 냉이, 아직 덜 풀린 땅 속에 있는 씀바귀뿌리, 양지바른 곳에 서둘어 올라온 쑥 같은 것들을 캐서 밥상에 봄을 올리려는 것입니다.

사철 같은 바다로 보이지만, 바다에도 사계가 있습니다. 톳도 따고 바위틈 거북손도 따고 물빠진 바다에서 조개도 캐서 밥상에 봄을 올리겠지요.

하지만, 밥상에 봄을 올리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겠지요. 언 땅을 호미로 파는 행위는 흙을 부드럽게 하는 행위요, 굳어져 공기의 흐름이 막힌 땅의 혈을 풀어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행위가 되는 것이요, 봄을 맞이하는 전위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들로 밭으로 바다로 일바지에 목장갑을 끼고 끝이 뭉둑하게 닳은 호미를 들고 나가는 이유는 먼저 봄을 맞이하여, 봄을 기다리는 이들의 희망이 되기 위함입니다.

호미를 처음 사면 끝이 날카롭습니다. 제가 몇 년전에 대장간에서 산 호미는 몇 년이 지났어도 아직 날카롭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호미는 끝이 다 닳아버려서 뭉둑합니다. 그 뭉둑함만큼 어머니의 삭신도 녹아내렸을 것입니다.

나의 날카로운 호미에는 녹이 앉았지만, 어머니의 뭉둑한 호미는 예리하게 빛납니다. 쓰면 쓸수록 빛나는 존재, 닳아없어진 만큼의 보람, 그렇게 되기까지 흘린 어머니의 그림자 노동, 그것을 알지 못하면서도 어머니의 수고에 기대어 사는 것들을 생각하면 뭉둑한 호미날이 숭고해 보입니다.

코팅된 목장갑을 처음 낄 때면 뻑뻑합니다. 코팅이 벗겨지고 부드럽게 되려면 몇 번의 강도높은 노동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머니의 호밋자루는 낡아서 검은 테잎을 칭칭 감았고, 목장갑은 부들부들하고 붉디 붉던 코팅색깔도 흐릿합니다.

조만간 코팅도 다 벗겨지고 손가락 어딘가부터 헤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저의 경우는 주로 엄지나 검지 손가락부터 헤지기 시작하는데, 목장갑이 수명을 다하고 헤질 때 은근히 느껴지는 희열감 같은 것이 있습니다. 빨고 또 빨아 쓰는 낡은 목장갑이 있어 그나마 어머니의 거친 손이 조금은 덜 거칠어지니 살신성인의 기품을 그에게서 봅니다.

봄꽃들이 여기저기에서 피어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일바지에 핀 꽃들은 그들보다 훨씬 먼저 피었습니다. 그리고 한 번 피면 시드는 법이 없습니다. 비록 색은 바래도 한겨울에도 화사하게 피어 있습니다.

젊어서는 이 무늬가 참으로 촌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자꾸만 끌립니다. 화사하고 강렬한 원색에 자꾸 시선이 가는 것을 보니 인생의 황혼기가 오긴 왔나 봅니다.
#몸빼 #호미 #목장갑 #그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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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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