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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노림의숙 앞에서 마주 선 두 사람

[산 · 책 · 글] 원주 최초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부론면 노림리

등록 2023.02.28 09:38수정 2023.02.28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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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방방곡곡에서 들불처럼 타올랐던 3·1 만세운동은 우리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3·1 만세운동을 거치면서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지가 높아져 무장 독립투쟁이 이어졌고, 농민운동, 노동운동, 청년운동, 여성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사회운동이 활성화 되었다. 최초로 민주 공화제를 바탕으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3·1 만세운동을 계기로 수많은 사람의 삶도 크게 바뀌었다. 만세 시위 현장에서 체포·투옥된 수많은 사람은 무자비한 고문으로 치명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었다.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간 사람들, 각자의 삶터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한 사람들도 많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총독부의 말단 관리가 되어 만세 시위를 방해하고, 헌병 보조원으로 시위 군중 탄압에 앞장섰던 조선인들은 일제 통치 기구의 수족이 되어 친일 행각을 이어갔다.

노림의숙 졸업생들 만세 시위 주도

1919년 3월 27일 강원도 원주에서도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부론면 노림리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사립학교 노림의숙 교사와 졸업생들이 중심이 되었다. 원주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은 1896년 설립된 원주 공립보통학교였다.

하지만 일제의 통제 속에 운영되는 공립보통학교는 지역민들로부터 외면당했다. 공립학교 입학 학생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입학을 원하는 학생이 거의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공립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들을 향한 반감까지 표출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국권회복과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사립학교와 개량서당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많아졌다. 이 무렵 원주에서도 서당을 중심으로 국권 회복과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교육이 강화되었다. 부론면 손곡리, 소초면 둔둔리, 흥업면 사제리, 부론면 노림리 등에 사립학교와 개량서당이 세워졌다. 원주에서 3·1 만세운동은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22일 부론면 노림리에 세워진 사립학교였던 노림의숙 졸업식에서 교사 어수갑과 홍남표는 독립선언서를 졸업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를 계기로 3월 27일 한범우를 비롯한 졸업생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에 뛰어들었다. 다음은 국가보훈처 공훈록에서 검색한 한범우 관련 기록이다.

'강원도 원주 사람이다. 1919년 당시 부론면 노림리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노림보통학교 졸업생으로 이 학교의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본래 노림보통학교는 일제 교육에 항거하여 1915년에 설립된 학교로 채용된 교사는 모두 항일 사상가였다. 이 학교는 1919년 3월 22일 제1회 졸업식이 있었는데 졸업생 40여 명에게 독립선언서가 배부되었다.


그는 이때 졸업생 중 한 사람으로 3월 27일 오후 4시 30분 경 부론면사무소 앞길에서 한돈우 김성수 등 수 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논의하고 있을 때 마침 원주 군수 오유영이 퇴청하여 귀가하는 것을 붙잡아 미리 준비한 대한독립만세기를 휘날리며 "철원 군수도 만세를 불렀는데, 왜 원주 군수는 부르지 않느냐"고 힐책하며 함께 독립 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하고, 그곳에 모여든 군중을 선도하여 독립 만세를 고창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공훈록에 등장하는 노림보통학교는 잘못된 표현이다. 1919년 당시 부론 일대에 노림의숙 이외의 보통학교는 없었다. 1920년 12월 흥호공립보통학교가 문을 열면서 부론 지역에 처음으로 공립보통학교가 들어섰다. 따라서 공훈록 노림보통학교는 노림의숙으로 정정해야 한다.

1919년 한범우를 비롯한 노림의숙 졸업생들은 부론면사무소(당시 흥업면 소재)에 동원되어 원주 군수 오유영의 시국 강연을 들었다. 3‧1운동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한 강연이었다. 독립이다 만세다 나대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군수의 강연에 분노한 한범우 등 몇몇 졸업생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에 면사무소 직원들이 동원되어 이들을 내쫓고 강연을 지속했다.

강연장에서 쫓겨난 한범우와 일곱 명의 졸업생은 노림리로 돌아와 깃발을 들고 강연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목인 노림의숙 부근에서 군수 오유영을 기다렸다. 군수는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 당나귀를 타고 나타났다. 졸업생들은 만세를 부르지 말라고 강연 하는 원주 군수의 행위를 비판했다. 철원 군수가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고 하니, 원주 군수도 만세 시위에 동참하라고 요구했다. 군수를 에워싼 군중들의 만세 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한범우와 오유영의 엇갈린 삶

원주 군수 오유영은 만세를 강요하는 졸업생들 앞에서 강연 내용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다가 쫓기듯 문막으로 이동해서 일본 헌병대에 신고했다.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한범우와 정현기가 체포되었고 나머지 졸업생들은 피신했다. 체포된 한범우는 10개월의 형을 받고 복역하다 석방됐지만 고문과 학대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원주 곳곳을 돌며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말라는 강연을 했고, 노림의숙 앞에서 시위 군중에게 붙잡혀 곤경을 치르다 가까스로 벗어나 헌병대에 신고한 원주 군수 오유영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된 그의 행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07년 군대해산 당시 시위대 교관으로 있다가 전역했던 오유영. 강원도 금성 군수가 된 후 1912년 일제로부터 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4년 원주 군수로 부임해서 1919년 한범우와 만났다. 당시 나이 45세. 이후 오유영은 친일반민족행위의 외길을 걸어가면서 일본 천황으로부터 각종 포상을 받아 챙겼다.'
 

노림리 당산목 느티나무 앞에 서면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가 열여덟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뜬 한범우와 만세 시위에 동참했던 사람들 생각이 난다, 아울러 친일반민족행위의 외길을 걸어간 오유영이란 이름도 떠오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곳이 원주 최초로 3·1 만세운동이 시작된 곳이라는 아무런 표시도 안내판도 없다.
덧붙이는 글 제 계정의 페이스북에도 게재했습니다.
#부론면 노림리 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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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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