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02 13:26최종 업데이트 23.03.02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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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일 문재인 전 대통령이 경남 양산시 하북면 평산마을 사저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면담하고 있다. ⓒ 더불어민주당

 
요즘 문재인만큼 핫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저쪽뿐 아니라 이쪽에서도 욕을 먹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편이라고 생각해 왔던 사람들한테서도 비아냥 대상으로 전락했으니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외로운 형국이다. 이런 상태에 처한 당사자를 보통 '동네북'이라고 부른다. 휘두르는 북채는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는다.

보수는 문재인을 왜 비판하는가? 문재인 정부의 무능과 부패로 인해 경제가 폭삭 망해버렸다고 보기 때문이다. 보수의 경제정책 목표는 '성장'이니, 그 주장의 구체적 내용은 필경 경제의 침체, 곧 저성장일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한국경제를 과연 저성장으로 내몰았는가? 2021년 수출은 사상 최고 수준을 달성했다. 주요 7개국(G7) 국가인 영국과 프랑스의 2020년 구매력평가 기준 1인당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각각 4만 4929달러와 4만 6422달러였다. 한국은 4만 3319달러이니 크게 차이가 없다. 이탈리아는 4만 1492달러로 한국 뒤에 있다. G7이 한국을 정상회담에 초대하는 건 괜한 일이 아니다.

21세기는 어떤 유형의 경제활동을 원하는가? 한물간 장시간 저임금노동과, 활용되지 않은 채로 쌓아 놓기만 하는 저축이 아니라 '혁신'이다. 세계지식재산기구(WIPO)에서 발표한 '2021년 글로벌 혁신지수'에서 한국은 세계 5위였다. 스위스, 스웨덴, 미국, 영국 다음이고 아시아에선 당당히 1위다. 전년도 10위에서 다섯 계단 상승했고 아시아 1위를 한 것도 최초다.

국가부도위험은 0.19%로 세계 17위일 정도로 양호하고 2008년 외환위기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코로나 위기 속에서도 국가신용등급은 최고수준(Aaa)을 계속 유지했다. 경제 상황이 양호해 온 나라들이 서로 돈을 빌려주겠다는 의미다.

세계 10위 경제대국, 세계 6위 수출국. 이걸 외면할 수 없었던지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해야 했다. 대한민국은 당당히 선진국이다. 모두 문재인 정부 들어 일어난 일이다.

이 성장의 '도덕적' 성격도 돋보인다.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2021년 국가청렴도 조사에서 한국은 180개국 가운데 32위를 기록했는데, 100점 만점에 62점으로 역대 최고치다. 국민은 이 '도덕적 성장'에 신뢰를 보냈다. 2017년 24%(32위)를 기록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 중 하위권에 머물렀던 '정부 신뢰도'는 문재인 정부 들어 2021년 45%로 상승해 20위를 기록했다.

경제는 성장했고 도덕은 고양되었으며 국민은 신뢰했다. 보수의 잣대로 측정할 때 문재인 정부는 무능하지도 부패하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내가 보기에 문재인 정부는 보수의 욕망을 지나치게 충족시켜 주었다. 경제성장과 부패로 치면 정권은 오히려 연장되었어야 했다. 억지도 저런 억지가 없다.

진보에 '좋은 불평등'은 없다
 

지난 12월 21일자 <문화일보>의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장 인터뷰 "소주성은 진보경제학의 실패작… 나쁜 평등보다 좋은 불평등이 낫다" ⓒ 문화일보


최근 들어 진보도 드디어 북채를 들었다. 진보의 북채 소리가 더 크고 매섭다. 실로 진보 진영의 '욕받이'로 소모되고 있는 형국이다. 진보는 왜 이토록 문재인을 증오하고 조롱하는가?

요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타임라인에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장의 기사가 공유되고 있다. 읽어보니 그의 브랜드는 '좋은 불평등'인데 진보적 시각에서 볼 때 해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진보와 보수의 정책목표는 뚜렷이 대비되는데, 전자는 평등(분배)이고, 후자는 성장이다. 그러니 평등을 지향하는 진보에게 불평등은 무조건 '나쁘다'. 좋은 불평등은 진보의 경제정책목표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불평등이 수용되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정한 한계 안에서만 허용될 뿐이다. 정치철학자 존 롤스는 이 한계를 '차등의 원리'로 정의했다. 곧, 불평등은 불가피할 수 있으나, 그것은 최소수혜자의 처지를 개선할 때만 허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진보에게 불평등은 불가피할지언정 어떤 경우에도 좋지 않다. 따라서 적어도 진보라면 불평등을 '좋은 것'으로 미화하면 안 된다. 진보경제학자들에겐 불평등을 '척결'하기에도 힘겹다. 불평등에 대한 미화는 보수경제학자로 충분하다.

좋은 불평등이라는 해괴한 신조어는 빤짝 아이디어로 치고 대충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채택한 "소득주도성장론은 진보경제학의 실패작"이라는 그의 주장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소득주도성장론을 잠정적으로 '한국형' 포스트케인지언 임금주도성장론으로 부르자. 포스트케인지언하면 존 메이너드 케인스, 미하엘 칼레츠키, 조안 로빈슨, 니콜라스 칼도어, 하이만 민스키, 마크 라보아 등 발군의 경제학자들이 자동적으로 떠오른다. 이들의 뒤를 이어 거의 100년을 수천수만의 훌륭한 경제학자들이 이 이론을 발전시켜왔다.

서구사회의 복지국가는 사실상 포스트케인지언 경제학의 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30년대부터 시작해 1970년대 초까지 실행된 이른바 '소득주도성장론'이 유럽의 복지국가를 과연 실패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는가? 그들은 세계의 모범국가요, 한국의 진보가 부러워하는 나라들이다. 용감해도 너무 용감하다. 충분한 학술적 검토를 마친 후 실패를 선언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빈자의 눈물 닦아준 '소주성'

이것도 지적하자. 성장이라는 말이 붙었지만 소득주도성장론의 근본 목적은 성장이 아니다. 평등과 분배가 본래 목적이다. 다시 말해 성장이라는 '경제적 효과'보다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회적 효과'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가계금융복지조사 마이크로데이터를 활용한 'LAB 2050' 이원재 대표의 분석 결과를 참조하자.

문재인 정부 출범 직전인 2016년에 조사 대상 가운데 최빈층(소득 하위 20%)이었던 가구의 소득은 2020년 거의 두 배로 크게 향상되었다. 구체적으로 최빈층 가구의 평균소득은 연간 1032만 원에서 2070만 원으로 오른 것이다. 물론 복지수당과 기초연금 등 이전소득만 늘지 않았다. 근로소득도 크게 올랐다. 그 결과, 과연 경제가 폭망했는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실증되었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빈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회적 효과'를 달성했다. 그렇다고 성장이라는 경제적 효과가 뒷전에 밀린 것도 아니다. 코로나19 정국 속에서도 세계 최고의 성장률도 기록했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실패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만약 미흡해 보인다면, 보수의 거센 저항 앞에서 채 피지도 못한 채 '좌절'되었을 뿐이다. 최 소장의 '소주성 실패론'은 설익고 섣부른 주장일 뿐이다. 충분한 학술적 연구와 실증적 검토 후 실패를 논할 일이다.

문용식 전 한국정보화진흥원장 역시 문재인 정부에 대한 대표적 비판 인사다. 그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으로 수립한 정권을 5년 만에 허망하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가 보기에 권력을 제대로 쓰지 못한 대표 분야는 '정책'과 '인사'다. 경제정책이 아닌 곳에 대해 내가 거론할 자격은 없다. '검찰·언론·사법·재벌·사학개혁 등 어떤 개혁도 이뤄내지 못했으며, 도리어 윤석열 정부 출범으로 검찰 공화국이 들어섰다'는 비판은 부인할 수 없는 뼈아픈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은 경제적 자본으로 뒷받침되고 사회적 자본으로 강고하게 뭉친 우리 사회의 주류계급이다. 주류의 강력한 정치적 저항과 이 주류를 수호하려는 피지배층의 완고한 문화적 습성을 기억할 때, 이토록 신랄한 비판이 타당한지 잘 모르겠다. 세상은 참으로 느리게 변하며, 그 느린 변화마저도 엄청나 희생과 인내를 요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터이다. 알면서 모르는 체하면 섭섭하다.

문재인에게 북채를 휘두르는 사람들에게 윤석열 검찰총장은 인사 실패의 결정판이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나는 최대의 인사 실패를 조국 법무부 장관에서 본다. 그것을 솔직히 인정할 필요가 있다.

호모사피엔스의 장점은 성찰하는 능력
 

지난 1월 28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위례·대장동 개발특혜' 의혹 수사와 관련해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는 가운데, 청사 입구에 포토라인이 설치되어 있다. ⓒ 권우성


며칠 전 문재인이 텃밭에 쪼그려 앉아 감자 심는 사진을 SNS에 올렸다. 진보는 또 조롱과 비아냥의 북채를 휘둘렀다. 이재명이 저렇게 위기에 처해 있는데도, 한가하게 노닐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정권을 뺏겨놓고서 말이다.

그러나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자. 그토록 복잡한 사법적 문제를 안고서 이재명은 왜 당 대표로 출마했는지 궁금하다. 이로써 이재명의 문제가 당의 문제가 되고, 급기야 이제 '진보적 의제'로 둔갑해 버렸다. '이재명식 진보적 의제'(?)에 가로막혀 '진짜 진보'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대장동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대장동 이전에 이미 차고 넘쳤다. 일반인은 이재명의 대장동에 별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가 '살아 온 방식'에 더 주목했다. 

더욱이 임기 말 줄곧 40% 이상의 지지율을 유지하던 대통령을 두고 국민의 정권교체 열망 때문에 정권을 빼앗겼다고 문재인에게 책임을 돌린다면 아전인수도 유분수지 않은가?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그 어떤 후보들보다 지지율이 높았다.

내가 보기에 윤석열과 같은 최악의 후보, 나아가 최약체를 상대하지 않는 이상, 합리적 중도시민과 진정한 진보시민이 이재명에게 두 번씩이나 표를 줄 가능성은 희박하다. '누가 덜 못하나' 게임을 지켜봐야 하는 국민도 슬프다. 이런 마당에 문재인을 끌어들이는 심보는 과연 무엇인가? 이제 북채를 거두고 회초리를 들 차례다. 그리고 자신을 쳐라.

실제를 외면하는 억지, 연구하지 않은 주장, 경험을 의도적으로 숨기는 태도, 성찰 없는 비판은 공허할 뿐 아니라 우스꽝스럽다. 그런 태로론 어떤 자발적 동의도 이끌어 낼 수 없다.

호모사피엔스는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유일한 종이고, 진화 법칙은 우리에게 이 훌륭한 본성을 선물했다. 너 자신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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