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지하철에서 만난 아저씨의 정체

등록 2023.03.01 20:21수정 2023.03.0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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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낮에 때가 탄 크록스를 끌고 후드를 뒤집어 쓴 채 산책을 다녀왔다. 프리랜서의 가장 큰 특권은 뭐니 뭐니해도 낮에 아무 때나 밖을 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마감만 제때 지킨다면)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프리랜서는 집순이 집돌이다.


나 역시 집 밖에 잘나가지도 않고, 심지어 햇빛을 못 봐 여름 내내 다리가 허옇다 못해 회색이었던 적이 있다. 이 소중한 특권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생각에 괜히 억울해졌다.

최근에는 이런 이유로 오후 한두시면 밖을 나서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집 앞 공원. 공동현관을 나서면 넘어지지 않아도 닿을 만큼 가까운 곳이다. 새들 커뮤니티에서 핫해져 흰 똥 범벅이 된 벤치는 피한다.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 광합성하는 할머니 무리도 지나친다. 그럼 나무 바로 밑에 위치한 벤치 하나가 나온다. 

아직 날이 추워 앙상한 나뭇가지가 햇빛을 가려주진 못해도, 공원의 모두와 어느 정도 편안한 거리를 벤치가 마음에 쏙 든다. 이제 자리에 앉아 멍을 때린다. 바람에 흔들거리는 빨강 그네, 초록 그네, 신난 강아지 때문에 겁먹는 행인이 있을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기 몸 쪽으로 줄을 끌어당기는 아주머니.

그러다 뜬금없이 이런 생각을 한다. "나 지금 너무 백수 같나?" 평일 대낮에 크록스 신고 공원에 나와 폰도 없이 멍 때리는 사람. 누가 봐도 백수가 맞긴 하다. 문득 예전에 글을 가르쳐 주시던 한 작가님의 일화가 떠오른다.

한창 일복이 터진 시기라 내가 밤을 새웠어. 머리도 안 감고 꾀죄죄했지. 한 손에는 만화책을 들고 슬리퍼를 찍찍 끌면서, 집 근처 편의점에 가 컵라면을 끓여먹었어. 근데 마침 내 옆으로 검은 비닐봉지를 털레털레 든 추리닝 남이 지나가는 거야. 속으로 야, 저 사람 참 백수 같다 생각했지. 근데 가만 보니 나도 같은 몰골이더라고. 


사람은 겉으로 봐선 모른다. 내가 중국에서 유학할 때의 일이다. 혼자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피곤에 전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겉모습은 학교 앞에서 구운 양념 감자를 파는 가게 아저씨가 겹쳐 보였다. 시골에서 상경해 북경에서 착실히 자식 뒷바라지할 것만 같았던 아저씨. 사실은 번듯한 직장에 한국어까지 능통한 북경 토박이었다. 

그날 나는 제멋대로 남을 평가한 것도 창피했지만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 중국엔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아 이마에 '나 부자'라고 써 붙인 사람도 있지만,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많은 걸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그게 무형의 것이든 유형의 것이든.

이렇게 세상이 겉보기와 다르니, 나도 남들이 보기엔 대낮에 멍 때리는 백수지만, 사실은 고뇌에 빠진 작가였다는 상상을 해본다. 머릿속에서 시나리오를 썼더니 시간이 뭉텅뭉텅 흘렀다. 참, 나 백수 아니지? 가서 번역해야 하는데. 재빨리 본업으로 돌아올 마음 채비를 한다.

나올 땐 백수였지만 벤치에선 베스트셀러 작가 그리고 다시 번역가가 되어 집으로 돌아간다. 다음에 집에서 나올 땐 차기작을 고뇌하는 작가가 진짜 내 본업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프리랜서 #산책 #편견 #유학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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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번역가ㅣ밤에는 작가ㅣ곁에는 러시아에서 온 쿼카. 그날 쓰고 싶은 말을 씁니다. 어제의 글이 오늘의 글과 다를지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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