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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런 3.1절 기념사는 없었다

[주장]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 피해자에게 책임 돌리는 '자학사관'

등록 2023.03.02 11:00수정 2023.03.02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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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

 
'이런 3.1절은 없었다'.

어제(1일) 윤석열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를 읽고 든 생각이다. 윤 대통령은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 기념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04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윤 대통령의 발언과 같은 것을 우리는 '자학사관'이라 부른다. 이 발언을 해석해보면, 윤 대통령은 한국인이 일제 지배를 당한 이유가 당시 세계 흐름을 못 읽어서, 제대로 대비를 못하는 등 무능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제국주의 침략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자학적이고 혐한적이며 역사적 사실도 아닌 말이다. 이런 말을 한국 대통령에게 들어야 하는가? 그것도 다른 날도 아닌 3.1절에? 

한 구절만 가지고 과도하게 비난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대통령 기념사 전문 어디를 보아도 3.1 만세운동이 대체 '누구와의 싸움'인지 나오지 않는다. 3.1 만세운동에 대해 말하면서도, '일제의 무력 지배에 대한 저항'이라는 핵심 의미를 빼고 언급하는 건 무슨 의도일까(관련 기사: 윤 대통령 "일본,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협력 파트너 됐다" https://omn.kr/22wsp)?

더 들여다보면, '일본'이란 단어는 기념사 전문에서 딱 한 번 등장한다. "3.1운동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다는 문장이다. 일본과의 변화된 현재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저 문장도 가만 보면 일본이 다른 곳이 아닌 '조선을 침략했다'는 사실, 나아가 그에 대한 책임은 교묘히 뺀 문장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일본의 과거사를 언급하는 방식이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3.1 만세운동을 "자유로운 민주국가를 위한 독립운동이었다"라고 칭송했지만, 이처럼 일본의 과거 잘못에 대한 명확한 지적이 없으니 공허하게 느껴지기만 한다. 당시 3.1 운동이 무슨 공정선거 캠페인 같은 것이었나? 적게 잡아도 5백 명, 많게는 7천 명 이상 일제에 학살당한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었다.

'한국 정부 믿어달라'는 시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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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주년 3.1절 - 윤석열 굴욕외교 한일합의 중단! 일본 식민지배 사죄배상 촉구! 범국민대회’가 1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일본의 강제동원 사죄와 전범기업 직접배상을 촉구하는 의원모임 공동주최로 열렸다.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와 참가자들이 집회를 마친 뒤 일본대사관까지 행진을 하고 있다. ⓒ 권우성

 
논술 시험이라면 논지가 대체 뭐냐고 지적당할 이 기념사는 정치적으로는 그 의도가 명확하다. 윤 대통령이 일본을 향해 '한국 정부를 믿어 달라'는 시그널을 보내는 거다. 한일 관계 개선에서 성과를 내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거다. 한일정상회담을 조속히 열고 싶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 큰 틀에서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 때문에 한국 국민이 우리 대통령에게서, 일본의 역사적 책임을 삭제하면서 우리가 무지해서 지배당했다고 폄훼하는 말을, 그것도 3.1절에 들어서는 안 된다. 한일 사이엔 위안부 및 강제동원 배상,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군사 재무장 등 일본 우익의 아집 때문에 더 꼬인 이슈가 여럿이다. 일본의 역사적 책임을 지우면 이 문제들이 잘 해결될까?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역사를 모르는 국민에게 역사는 반복된다는데, 국민이 기억하는 역사를 지우려 드는 대통령을 보고 있다. 정말이지 이런 3.1절은 없었다.
덧붙이는 글 필자 오준호는 기본소득당 공동대표, 기본소득정책연구소장입니다.
#3.1절기념사 #윤석열대통령 #일본제국주의 #기본소득당오준호 #3.1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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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기본소득당 공동대표. 기본소득정책연구소장.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기본소득 쫌 아는 10대> <세월호를 기록하다> 등을 썼다. 20대 대선 기본소득당 후보로 출마했다. 국회 비서관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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