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02 13:25최종 업데이트 23.03.02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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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

 
'강제징용(노동자 강제동원) 문제를 봉합하면 5월 G7 정상회담에 초청하겠다' 등의 전망을 제시하며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상태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3·1절 기념사를 발표했다(관련기사: 윤 대통령 3.1절 기념사 세 가지에 경악했다 https://omn.kr/22x21).

그는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들끓었던 3·1운동을 경축하는 이 연설에서 "104년 전 3·1만세운동은 기미 독립선언서와 임시정부 헌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국민이 주인인 나라, 자유로운 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이었습니다"라고 평가했다.

그런 뒤 "세계사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불행이 반복되게 될 것은 자명합니다"라며 과거의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노하우'를 제시했다. 그는 "조국을 위해 헌신한 선열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습니다"라며 순국선열들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을 노하우로 제시했다. 뒤이어 또 다른 노하우를 이렇게 제시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3.1운동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특히, 복합 위기와 심각한 북핵 위협 등 안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미·일 3자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 우리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연대하고 협력해서 우리와 세계시민의 자유 확대와 공동 번영에 책임있는 기여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104년 전,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외친 우리 선열들의 그 정신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윤 대통령은 일본과의 파트너십 발전을 미래를 위한 노하우로 제시했다. 그는 일본을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 속에 용해시킨 뒤 이런 나라들과 연대하는 것이 104년 전의 정신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일본과의 연대가 3·1정신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 셈이다. 

윤 대통령이 말한 '보편적 가치'는 일본이 미국과 함께 인도태평양전략을 통해 중국을 압박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윤 정부가 그런 용례를 따른다는 점은 작년 12월 27일 공개된 한국판 인도태평양전략에서도 확인된다. <자유, 평화, 번영의 인도-태평양전략>이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 제2장은 그런 용례를 따라 "자유, 민주주의, 법치주의, 인권 등 보편적 가치에 기초한 규칙 기반 질서"라는 표현으로 보편적 가치를 정의한다.

보편적 가치에 포함된 자유·민주주의·법치주의·인권은 다 좋은 말들이지만, 이런 가치들은 중국 같은 나라에서는 다른 양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를 명분으로 일본과 미국은 중국이 보편적 가치에서 벗어났다며 인도태평양전략으로 압박을 가하고 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중국 견제가 아닌 식민지배 문제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보편적 가치를 언급했다. '일본은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협력 파트너로 변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중국 견제나 미·중 패권경쟁에서 말하는 보편적 가치와 달리, 식민지배 문제에서 말하는 보편적 가치는 '세계 인류를 제국주의로 착취해서는 안 된다', '제국주의 범죄에 대해서는 사과하고 배상해야 한다'는 것 등등이다.

일본이 이런 보편적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는데도, 윤 대통령은 식민지배 문제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일본을 '보편적 가치를 받아들이는 나라'에 포함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로 일본을 두둔한 것이다. 강제징용 문제 봉합과 한·일정상회담 성사에 치우쳐 있는 윤 대통령과 참모진의 정서를 느끼게 된다.

40년 전 한국 대통령 기념사 
 

1984년 9월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와 만나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83년에도 한·일 관계가 긴장돼 있었다. 우경화로 달려가는 일본이 1982년 6월에 노골적인 역사 교과서 왜곡을 벌여 한국인들을 분노케 한 직후였다. 베트남 전쟁과 68혁명으로 위기에 처했던 미국이 힘을 추스르며 반격에 나선 1980년 전후의 세계정세에 편승해 일본 우익이 그런 방식으로 세력 확대를 모색할 때였다.

당시 우리 국민들이 일차적으로 원한 것은 일본과의 무조건적 협력이 아니라 일본의 사과·반성이었다. 1982년 6월 26일 자 일본 언론보도로 알려진 문부성의 역사교과서 검증 결과를 보면 한국인들의 사과·반성 요구는 결코 무리한 것이 아니었다.

문부성은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을 '외교권 접수'로, 토지조사사업에 의한 부동산 약탈을 '토지 소유권 확인'으로 미화했다. 또 '침략'은 '진출', '출병'으로 둔갑시켰다. 3·1 운동은 '데모와 폭동'으로, 8·15 한국 광복은 '일본의 지배권 상실'로 폄하시켜 놓았다.

이에 대한 한국인들의 분노는 곳곳의 시위로 분출됐다. 민주화를 요구하던 국민들이 이번에는 일본의 반성을 요구하면서 거리로 뛰어나왔다.

이 때문에, 7월 27일 자 <조선일보> 하단에 나타나듯이, 서울 종로경찰서는 반일  시위대의 일본 대사관 공격에 대비해 기동전경대원 50명을 별도로 비상 대기시켜야 했다. 9월 16일 자 <경향신문> 7면 하단에 실렸듯이, 서울대는 '학생에게 고함'이라는 공고문으로 집회를 금지시켜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전두환 정권은 일본의 사과·반성을 촉구하기보다는 일본과의 연대에 치중했다. 박정희 정권 몰락 뒤에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는 민주화 열기를 5·18 광주 학살로 짓밟은 전두환 정권은 박 정권의 초기 행보를 모방해 일본 경협 차관을 얻는 데 주력했다.

전두환 정권은 설상가상으로 경제협력뿐 아니라 군사협력까지 추진했다. 윤성민 국방부 장관이 국회에 출석해 "정부는 앞으로 보다 현실적인 한·미·일 군사협력 강화 방안을 강구해나갈 것"이라고 발언했다는 1983년 9월 6일 자 <동아일보> 기사 '한미일 군사협력 강화'에도 나타나듯이, 전두환 정권은 한·미·일 군사협력이라는 용어를 써가며 한·일 군사협력 추진을 정당화하려 했다.

전두환 정권이 한국 국민보다는 일본 정부를 더 의식했다는 점은 3·1운동 제64주년을 경축하는 1983년 3·1절 기념사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해 1월 11일 한국을 방문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로부터 방일 초청을 받고 일본 방문을 기대하게 된 전두환의 '설렘'을 이 기념사에서 느낄 수 있다.

전두환은 1981년부터 1987년까지의 3·1절 기념사에서 '3·1운동의 의의를 높이 평가한 뒤, 일본제국주의 비판이 아닌 북한 비판으로 옮겨가는 패턴'을 반복했다. 일례로, 1983년에는 "3·1 정신을 우리가 진정으로 승계하는 길은 우선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그 기틀 위에서 안으로 우리의 내실을 튼튼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직후에 "우리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외부의 위협은 말할 것도 없이 북한 공산집단에 의한 것입니다"라고 못을 박았다.

이렇게 북한과의 투쟁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그의 기념사는 방일 초청을 받은 직후인 1983년에는 이상한 흔적을 남겼다. "이번 세기의 초반 일본 식민주의의 굴레 속에"(1981년), "우리에게 있어 일본 통치가 준 쓰라린 교훈"(1982년)에서 나타나듯이 3·1운동을 회상하는 대목에서 일본을 언급했던 1981년·1982년과 달리, 1983년에는 일본이란 단어가 연설문에 나타나지 않았다. 3·1운동이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를 겨냥한 것이었는지를 명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뒤 엉뚱한 주문이 기념사 결론부에 나타났다. 일본에 대한 지난날의 감정을 털어버릴 것을 촉구하는 주문이었다. 1983년 연설은 이렇게 끝났다.
 
우리는 지난날 우리를 침략한 세력에 대한 증오와 울분을 이제는 우리의 국력을 신장하여 선진조국을 창조하는 원동력으로 가꾸어 나가는 슬기와 금도를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책무에 충실할 때 우리의 선인들은 지하에서도 성원과 가호를 아끼지 않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우리 조국의 영원한 수호와 구원한 번영을 위해 다시 한번 온 겨레의 합심과 분발을 바라는 바입니다.
 
일본이 사과·반성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일본에 대한 울분을 털어버리자고 주문하는 것은 한국인들을 분노케 하는 한편 일본 우파를 기쁘게 하는 일이었다. 전두환의 연설이 한국 국민과 일본 정부 중 어느 쪽을 더 의식한 것인지는 이로써 명확해진다.

1983년 기념사는 나카소네를 만나고 그의 초청을 받은 뒤로 일본에 더욱 기울어진 전두환의 정서를 보여주는 자료가 될 만하다. 일본이 아닌 북한을 맹공격하는 그의 기념사는 1984년에도 계속됐고, 그의 방일은 그해 9월 6일 실현됐다.

일본 총리의 초청을 받은 뒤, '일본에 가야 할 사람답게' 3·1절 기념사를 발표한 전두환의 모습은 한국 대통령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일본 정부의 위력을 절감케 만든다. 국민의 명령보다 일본의 명령 앞에 움찔하는 한국 대통령의 모습은 한국 국민들을 서글프게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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