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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가 얼어붙는 순간 "한 명씩 말해봅시다"

회의를 잘 이끄는 리더의 특징... 지적질 하거나 의견 강요는 가급적 피하는 게 좋아

등록 2023.03.20 15:52수정 2023.03.20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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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0시민기자들이 쓰는 달콤살벌한 순도 99.9%의 현실 직장인 이야기.[편집자말]
영화 <그래비티>를 봤는지 모르겠다. 간단히 얘기하면 우주에서 혼자 살아남은 주인공이 지구로 귀환하는 이야기인데, 집중하다보면 무서운 장면 하나 없이 어마어마한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우주 파편에 의해 동료를 잃고 우주를 떠돌게 되는데, 직장에서 그녀의 심정을 10분의 1쯤 느낄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의견을 모으는 회의 시간이다. 여기서 리더의 발언 하나가 우주 파편쯤 되는데 그건 바로...


"돌아가면서 한 명씩 말해 봅시다."
 

순간 회의실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는다. 마치 엄청난 속도로 지구를 돌고 있던 우주 파편이 우주 정거장을 휩쓸고 지나가듯 순식간에 위기 상황이 만들어진다. 가히 가공할 만한 위력이다. 사자후도 아닌 것이 한순간에 모두를 제압한다.

이런 회의는 괜찮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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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를 기다리는 두려움 ⓒ Pixabay

 
그 순간 모든 사람은 우주를 떠도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게 된다. 막막함과 걱정, 떨리는 눈빛과 바짝 긴장한 자세가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빠른 속도로 주위를 둘러보며 다들 괜찮은지, 누구라도 자신을 구해 줄 사람은 없는지 살피는 것도 비슷하다.

개중에는 반쯤 포기한 자세를 보이는 이도 있는데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유유히 우주로 사라져갔던 남자 배우가 오버랩 되어 보이기도 한다. 영화에서 느꼈던 안쓰러움이 그대로 전해진다.

회의는 필요하다. 작은 일 하나를 처리할 때도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으다보면 더 좋은 방법이 나오기도 하고 예상되는 걸림돌을 발견하여 사전에 조치하기도 한다. 더 나은 방향을 가늠하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는 일은 빨리 시작하자면서 무턱대고 달려드는 것보다 훨씬 건설적이다. 하지만 반드시 모두의 입이 필요하진 않다.

어떻게든 말을 하게 하려는 회의가 있다. 리더의 입장에서 빨리 많은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싶은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 리더는 리더만의 남다른 압박감이 있기에 구성원이 그 압박감을 덜어주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강제된 분위기는 좀 곤란하다. 


"누구부터 말해볼까?"

아직 남아 있던 파편이 뒤늦게 들이닥친다. 결정타다. 눈이 내리깔린다. 이젠 주변을 살펴볼 여유도 없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위기를 직면하게 될 터,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외면부터 해야 한다. 다행히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누군가가 입을 연다. 됐다. 이제 중언부언의 시간이다.

"OOO 책임이 말한 것처럼, 이러저러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러이러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이러저러가 나은 것 같네요."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만, 이래저래는 어떨까 싶습니다."


아무도 소외시키지 않으려는 배려가 이런 회의를 만들기도 한다. 사람의 기질이 모두 다른 탓에 멍석이 깔려야만 비로소 활약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깔린 멍석은 너무 작다. 모두를 위한 사이즈가 아니다.

사람들은 불편해하고 제대로 뛰놀지도 못한다.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고 강제하지도 않으면서 모두의 의견을 이끌어 내기 위해선 모두가 뛰어놀 수 있는 멍석이 필요하다.

모두가 뛰놀 수 있는 멍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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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힘을 더하는 회의 시간 ⓒ Pixabay

 
의견을 쉽게 내놓고 여러 의견을 논의를 통해 좁힐 수 있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회의 분위기에 달렸다. 그리고 그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단연 리더의 태도다.

리더의 말하는 태도는 멍석의 크기를 키우고 리더의 듣는 태도는 멍석의 두께를 늘린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멍석 위에 앉게 되고 푹신한 멍석 위에서 다칠 걱정 없이 이리 저리 노닐게 된다. 그렇게 '대다수'가 참여하는 회의가 만들어진다.

"아! 아까 이 얘기를 했어야 했는데... 이따 따로 가서 말씀드려야겠어요."
"아까 A로 얘기했던 거 A'로 해보면 어떨까 싶기도 하네요."


회의를 마쳤음에도 동료들 간에 이런 대화가 오가는 것을 볼 때면 더 뛰놀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 모습이 엿보인다. 여운이 남는 회의. 이런 회의 뒤에는 보람이 있다.

누구나 발언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면 굳이 과한 배려는 필요치 않다. 어떤 의견도 비난하지 않고 엉뚱한 생각도 무시하지 않는 회의 분위기가 중요하다. 모두에게 원치 않는 발언의 기회를 강제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뜩이나 편할 수만은 없는 회의 시간에 부담을 더해서야 건설적인 대화는 오가기 힘들다.

의견을 내놓는 순간 안 되는 이유와 의견의 부족한 점을 '꼬집는' 리더가 있다. 꼬집히면 아프다. 그래서 의견을 나누자는 자리는 반박의 장이 되고 좋은 아이디어를 가리는 것이 아닌 승자를 가리는 자리가 되고 만다. 의견이 존중받는 대상이 아니라 지적받는 빌미가 되면 누구도 그런 '스트레스'를 무릅쓰고 의견을 내놓을 리 없다.

의견을 '구하는' 자리에선 강요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뭐라도 내놓으라고 생떼를 쓰는 사람에겐 줄 것도 안주고 싶은 게 사람의 생리다. 강압으로 받은 자백이 무효이듯 강압으로 내놓은 아이디어도 보통은 실효성이 없다. 뭐든 자연스러워야 한다.

생각을 모은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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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드래곤볼의 주인공처럼 모두의 '자발적인' 힘을 '구하는' 리더 ⓒ 남희한

 
내가 좋아하는 리더들은 가벼워 보이지만 진중한 사람들이다. 말에 유머가 있고 지시나 목적은 명확하다. 똑같은 말임에도 부담스럽다거나 반발심이 잘 생기지 않는다. 간혹 이건 아니다 싶으면 어느새 내 입에선 생각이 소리가 되어 나간다. 그리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새어나간 볼멘소리는 리더의 너그러운 반응에 의견이 된다.

좋은 의견 고맙다는 칭찬에는 뿌듯함이 인다. 자칫 불만으로 치부할 수도 있는 감정을 순식간에 뿌듯함으로 되돌려주는 마법. 리더가 과시할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이다. 그 덕에 자꾸 입이 절로 열린다. 게다가 여기저기 모가 나있는 나 같은 사람이 직장생활을 해나가는데 이런 리더들의 도움이 실로 컸다.

생각을 모은다는 것은 드래곤볼에서 손오공이 원기옥(지구인의 힘을 조금씩 받아 만드는 에너지 구체)을 만드는 메커니즘과 같다. 손오공이 모두의 힘을 조금씩 빌려오는 것과 같이 리더는 모두의 생각을 조금씩 빌려와야 한다. 그리고 이 원기옥은 모두를 위한 것으로, 강제로 그러모으는 것이 아닌 공감한 이들의 자발적인 기여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난관을 이겨내는 '모두를 위한' 막강한 힘이 될 수 있다.

회의가 끝났다. 지구에 겨우 귀환한 그래비티의 주인공이 되어 안도감을 느낀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나름 스릴있는 것이 그럭저럭 할 만하다. 나는 인생의 주인공이고 주인공은 언제나 위기를 겪곤 하니까. 하지만 이왕이면 나의 리더가 드래곤볼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회의에서만큼은 살았다는 안도감보다는 우리 모두의 힘이 모인 빛나는 원기옥을 보며 뿌듯함을 느끼는 것이 더 감동적일 테니까.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3040시민기자들이 쓰는 달콤살벌한 순도 99.9%의 현실 직장인 이야기.
#직장살이 #회의시간 #리더십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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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렀지만 넌 또 모르잖아"라는 생각으로 내일의 나에게 글을 남깁니다. 풍족하지 않아도 우아하게 살아가 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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