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07 06:48최종 업데이트 23.03.07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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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막장, 마지막 정거장, 밑바닥 인생, 완행열차...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폄훼와 하대, 조롱, 멸시당하며 눈물 젖은 밥벌이에 뛰어든 일용잡부를 흔히들 '노가다'(일본어, dokata, 土方)라 칭한다. 노가다 꾼은 씹다 씹다 단물이 쏙 빠진 껌처럼 끝내 버려지는 비운의 삼인칭이다. 27년 동안 한 기자생활을 마치고 새로운 노동으로 지난해 9월 노가다를 시작했다. 몇 차례에 걸쳐 직접 겪은 땀의 현장을 전한다.[기자말]

추위를 녹이기 위해 설치한 야적장 드럼통에 불이 피어 오르고 있다. ⓒ 나재필


돈을 열망하는 사람들이 불나방처럼 모여드는 곳, 비록 현재는 누추하나 잠시 인생의 소낙비를 피해 희망을 찾는 열린 은거지. 노동자들은 정글 같은 이곳, 막노동 현장을 잠깐의 서식지로 삼는다.

전국 각지에서 온 이방인들은 저마다 푸른 꿈을 꾼다. 가지각색의 사연은 대부분 흰 빛깔이 아니라 애잔하다. 무표정한 얼굴 속에 가려진 비애는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묵언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비난할 수 없고 폄훼해서도 안 되는 노동의 참가치를 일깨워준다.


그들의 족적과 흔적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보는 이유는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삶의 그 어떠한 상황도 늪지로 옮겨놓고 생각하면 견딜 만해지는 것 아니던가. 힘들면 힘든 대로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괴로움을 떨치는 지혜다.

노동자들은 20대부터 60대 이전까지 골고루 분포돼 있다. 여기선 열 살 차이든, 마흔 살 차이든 모두 '형님'으로 불린다. 유도원(건설현장교통정리원)을 하는 여성은 통칭 '이모'이고, 이모는 근로자를 '반장님'이라고 부른다. 아들뻘 되는 팀원이 '형님'이라고 부를 땐 가끔 겸연쩍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젊은 사람이 젊은 호칭을 써주니 감사하다.

나와 팀을 이룬 이들은 대부분 20~30대 초반이다. 젊고 힘이 넘치며 생기가 돈다. 50대 중반인 나와 그들은 잘 섞이는 편이다. 이쪽 일에서 그들은 나보다 선임자다. 적게는 2년, 많게는 10년 더 짬밥을 먹었으니 선배다.

그래서 배울 건 배우고 존대할 건 존대한다. 허물없이 지내려면 말을 놓아야 하는데, 반말을 쓰지 않는다. 어느 정도 긴장과 이완의 관계가 좋다. 말을 놓기 시작하면 어느새 경시하는 버릇이 생길 것이고, 그렇게 되면 꼰대나 '쩌리'(중심이 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비중이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소리를 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그들을 만나면 가볍게 안거나 손을 잡아준다. 인사 겸 하루의 안전을 기원하는 무언의 교감이다. 그들과 몇 번의 술자리를 가졌는데 절망보다는 희망적인 얘기를 많이 해 놀랐다. 잠깐 막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한동안 업(業)으로 삼을 것이란 다짐도 들었다. 같은 나이대에 비해 소득이 높다는 게 이유였다.

나는 나잇값 못한다는 소릴 듣지 않기 위해 청춘처럼 일한다. 지금껏 결근해본 적이 없다. 지각없는 완벽한 만근이다. 술을 진탕 마신 다음 날에도 내 근육은 푸르게 뛴다. 돈을 벌기 위해 모인 목적성이 같기 때문에 나이대접받기 싫다.

조선소 출신 다수... 부지런히 벌며 꿈꾸는 청년들
 

노동자들이 출퇴근시 이용하고 있는 오토바이들 ⓒ 나재필

 
노동자 중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부류는 조선소 출신들이다. 업종 불황이 장기화되고 외국인 근로자 대거 유입, 저임금 때문에 바다를 떠나 내륙으로 흘러왔다. 이들을 가리켜 '조선족'이라 부르기도 한다(비하의 표현이 아니라 그만큼 조선소에서 온 사람들의 수가 많아서다).

5년 전까지 조선소에서 일하다가 이직한 30대 A씨는 "지금 대형 조선소 하루 일당이 12만~13만 원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더 안전하고 대우도 좋은 대기업 현장은 8시간에 16만~20만 원 정도 받는다"며 "조선소는 위험하고 단가도 저렴해 그곳으로 돌아가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다가 도산해 이곳까지 떠밀려온 50대 B씨는 아직도 빚더미에 눌려 산다. 이혼까지 해 숙소생활을 하며 재기를 꿈꾸지만 갈 길이 멀다.

"직원을 30명 넘게 둘 만큼 꽤 괜찮았는데 사업이 망하고 빈털터리가 됐습니다. 어머니 땅까지 처분했는데도 안 되더라고요. 인생이란 은근살짝 다녀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공 원칙이 아니라 실패하지 않는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 중이에요. 열심히 벌어서 자그마한 편의점을 운영하는 게 목표입니다."

평택 대기업 공사현장에서 일하다 낙향한 30대 C씨는 치킨집 개업을 준비 중이다. 한 달에 700만~800만 원을 꾸준히 벌어 목돈을 마련해놨다.

"모아둔 종잣돈에 대출을 보태 창업합니다. 처음 해보는 일이지만 걱정은 안 해요. 하루 4시간씩 자면서도 막일도 해냈던 나 아닙니까. 막노동 DNA는 잡초 같은 것이에요. 아무리 밟히고 뽑혀도 다시 소생하는 강력한 힘을 지녔습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어느 정도 특화돼있다고 보면 됩니다. 맑은 물에만 몸을 두지 않고 탁류에도 맞설 작정입니다."

소방관 시험 준비를 하다가 조공(기술공 지원)이 된 서른 살 D씨는 자수성가를 꿈꾼다. 대기업 건설공사 채용공고를 보고 이거다 싶어 막일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고향집을 떠나올 때 내 손에 쥔 돈은 달랑 2만 원이었어요. 업체에서 숙소를 잡아주고, 식사(식권)도 제공해 돈 쓸 일이 별로 없습니다. 2~3년 열심히 뛰어 전세자금을 마련할 계획입니다. 저는 노동판을 하나의 게임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 대부분은 이기기 위한 게임이 아니라 지지 않기 위한 게임을 하잖아요. 그래서 재정적으로 힘들고요. 그런데 지금 이 생활은 먼지 끼고 비루먹고 속절없는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청춘의 시간을 이기기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다. 연애하면 돈을 모으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다. 집에 손 안 벌리고 스스로 자립할 때까지 안 쓰고 버티겠다는 것이다. 그의 결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새로운 시작 위한 마지막 몸부림

이곳엔 열혈 인생을 살다가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이 적지 않다. 삼류 노가다 판을 전전하다 병을 얻게 된 사내, 묘령의 여자를 만나 행복을 꿈꿨지만 사기를 당한 사내, 홀어머니의 병원비를 위해 노가다에 알바까지 뛰는 사내, 돈 안 되는 공부를 접고 일찌감치 돈 되는 일을 선택한 사내 등.

노가다는 '슬픔'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일하는 사람은 일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남이 일한 흔적도 좋아한다. 피해 갈 수도, 마주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절묘한 기피를 선택하지만 노동자들은 도망가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한다.

노동자끼리는 서로를 위로하지 않는다. 불문율은 아니지만 슬픔은 가슴 밑으로 침전할 뿐, 겉으로 드러내는 법이 없다. 특히 노가다 현장은 이직이 잦은 편이다. 일감이 줄어 공수(노동일수)가 적게 나오거나 단가(일당)가 타 업체에 비해 적을 경우 노동자들은 미련 없이 짐을 싼다. 팀장이나 팀원과의 호흡이 맞지 않아 떠나는 비율보다 이런 이유가 많다. 모두 합당한 노동의 대가를 원하기 때문이다.

단기간 일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이직을 결행하는 사람들도 많다. 떠날 땐 '말없이'가 기본이다. 친한 동료 외에는 귀띔조차 않는다. 그래서 별안간 이별이다. 어차피 돈벌이가 목적이기 때문에 여타 사정은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지역을 넘나들기도 한다. 경기도 파주, 평택(고덕), 이천, 용인이나 충남 아산 탕정(천안), 당진, 충북 청주, 오창 등 조건이 맞는 곳으로 둥지를 옮기는 것이다.

'하다하다 안 되면 노가다라도 하지.' 천만의 말씀이다. 노가다는 끝이 아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다. 그래서 처음 입문한 이들도 적지 않다. 상처 없는 삶이란 없다. 상처에 직면해 그것을 이겨내려고 애쓰면서 단단해지는 것이다.

굳은살이 박이면 대단하게 아픈 일도 그냥 넘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굳은살을 만드는 게 노동이다. 굳은살은 파치(깨어지거나 흠이 나서 못 쓰게 된 물건)가 아니다. 살아 꿈틀거리는 노동자의 근육이다. 노동자들은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참으며 몸의 원형질을 다듬어가고 있다.
 

근로자들의 고단한 작업 흔적들이 협착방지, 자상 방지용 장갑에 오롯이 남아있다. ⓒ 나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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