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09 10:52최종 업데이트 23.03.09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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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 수제비 가게 단골이었다. 그 집은 수제비 한 그릇의 가격이 저렴했고, 수제비가 딱 맛 좋게 야들야들했으며, 직원분들이 모두 우리 할머니 연세셔서 그런지 할머니가 생각나 정답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그분들이 먼저 '딸 왔네~'라며 맞아주기도 하셨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머리를 짧게 자른 내가 마찬가지로 머리가 짧은 여성 친구와 자리에 앉았을 때의 일이다. 한 분이 우리 자리까지 오셔서는 날 유심히 보며 뜬금없이 '남자냐 여자냐'고 물어보셨다.


 "여잔데요…?"

그때야 나는 카운터와 주방을 오가는 "아들 하나" 라느니 "딸 둘"이라느니 하는 말의 뜻을 이해했다. 나를 맞아주느라 딸이라고 불러주신 게 아니라, 그게 주방에 들어가는 주문이었던 것이다. 식사 내내 불길한 예감에 시달리다가 계산하는 김에 왜 손님을 딸 내지 아들이라고 하느냐고 여쭈었다. 그분들은 '그게 정이 있어서' 그렇게 부른다고 하셨다.

나는 딸과 아들이 주문할 때 음식이 다르게 나오냐고 물었다. 곤혹스럽다는 듯이, 아들들이 더 먹으니 좀 더 준다고 하셨다. '딸'이 성별에 따라 같은 값을 받고도 다른 양의 수제비를 넣어주는 걸 문제 삼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하신 것 같았다.

그 뒤로도 몇 번 그 가게를 찾았지만, 이제는 가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그 가게의 수제비 맛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걸 먹겠다고 남자와 같은 돈을 내고도 덜 찬 그릇을 받는 '딸'이 되는 굴욕을 더는 못 참겠다.
 

밥 ⓒ 유문철

 
부지불식간에 차별  

나의 취미는 맛집 탐방이다. 음식별로 잘한다는 식당을 많이 알고, 또 많이 다녔다는 데에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직업 특성상 사람 만날 일이 많다 보니 지역별로 괜찮다는 카페를 꿰게 되었고, 중요한 자리를 앞둔 친구들에게 종종 식당을 추천해주기도 한다.

얼마 전 나는 웹서핑 중 '남친 또는 남편 더 많이 먹으라고 미리 배려해주는 식당'의 목록을 보게 되었다. 사전 양해나 고지 없이 손님의 성별에 따라 음식의 양을 다르게 내주는 가게에서 식사한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나눈 공동 게시물이었다. 이런 가게가 설마 많을까, 혹시 내가 아는 가게도 있을까? 아마도 적을 것이고, 없으리라 생각하며 읽어본 리스트는 자못 충격적이었다. 적힌 상호만 수백에 달했고 유명한 맛집도 여럿 섞여 있었다. 게다가 내가 가본 곳도 한두 곳이 아니었다.

리스트에 있는 모든 식당에 가서 진짜 그런지 확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사람들이 게시물에 쓴 경험담이 맞을 개연성이 크다. 

늦은 시간까지 이어지는 세미나를 끝낸 뒤 팀원들과 함께 찾았던 유명한 복어 맛집, 건강이 악화되어 세상만사에 자신이 없어 잔뜩 쪼그라들어 있던 나를 격려하며 친구들이 식사비를 대신 계산해주던 찹쌀순대집, 독립을 앞둔 친한 동생에게 월세 계약하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술을 사주었던 보쌈집.

나는 삶의 잊지 못할 순간을 보냈던 그 가게들의 상호를 리스트에서 읽으며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배신감을 느꼈다. 유명 서베이에서 몇 년 내리 선정된 검증된 맛집이자 인기 있는 식당, 이미 다녀온 주변 사람들로부터 맛있다고 칭찬이 자자하던 식당, 인터넷 후기 글이 좋고 별점이 4.5가 넘던 술집. 그곳에서 부지불식간에 차별당했다는 생각에, 소중히 간직하던 기억들에 몇 방울 흙탕물이 튄 것 같았다.

내가 소중한 사람들을 굳이 저런 곳으로 데리고 가서 안 겪어도 될 꼴을 겪게 했네, 싶어서. 그리고 여자 손님인 나와 우리를 하찮게 여긴 그 식당들을 우리는 너무 좋아해 줬구나, 라는 기만당한 느낌에.  

그건 성차별이고 사장님 센스도 별로입니다

같은 돈을 받았다면 손님의 성별이나 나이를 따지지 않고 같은 음식을 차려 내놓는 것이 상식이다. 다른 양의 음식을 팔 거라면 돈을 다르게 받는 게 정직한 장사다. 하지만 놀랍게도 어떤 사전 양해나 고지도 없이 부지불식간인 여자 손님에게 같은 값을 받고도 밥을 덜 주는, 즉 단위 가격당 더 비싼 돈을 내게 하는 사장들이 있다. 이런 사장님들은 대체 왜 이러시는 걸까.

우선 내가 직접 들은 '딸 같고 아들 같아서'라는 아리송한 답변에 대해 생각해봤다. 한국의 밥상에서 딸 같고 아들 같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남매로 자란 많은 한국 여성이 집에서 밥상머리 차별을 경험한다. 명절에는 성별에 따라 다른 상에 앉아 다른 반찬으로 식사를 하고, 닭다리는 아들의 몫으로 주어지고, 갈비찜은 오빠의 밥그릇 앞에 놓이고, 남동생의 라면에만 계란이 들어간 경험은 흔하며 '아들은 많이 먹어야 하니 더 주고, 딸은 덜 먹어야 하니 덜 준다'는 기준은 보편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다.

애초에 남자가 더 먹어야만 하고 딸은 덜 먹어야만 하는 이유가 뭘까. 그런 건 없다. 식당에서의 '딸 대접'은 사람 냄새로 포장된 성고정 관념이며 정다움으로 포장된 차별이었다. '딸 취급'을 받느라 내 돈 주고 사먹는 식당에서까지 '아들'보다 밥을 적게 받아야 한다면, 그깟 정 따위는 사양이다. 

어떤 사장님들은 '남자 손님은 많이 드려도 남기지 않고 다 먹는 반면 여자 손님은 같은 양을 주면 남겨서 버려야 한다'는 이유로 양을 달리 내준다고 하신다. 심지어 이렇게 미리 양을 다르게 서빙하는 것을 나름의 센스이며 노하우라고 자부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나는 대체 어떤 사고 과정을 거쳐서 이 사장님들이 성별에 따라 밥을 더 주고 덜 주는 게 '센스 있다'라는 결론에 다다랐는지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내가 갔던 인심 후한 식당들은 손님도 모르게 미리 밥을 더 주거나 덜 주는 방식이 아니라, 손님이 잘 먹고 더 오래 있을 낌새가 보일 때 '서비스'를 따로 주었다. 아마도 이게 '센스 있다'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장사가 아닐까 싶다.

식당에서 손님이 비용을 지불할 때는 음식, 요리에 들어가는 인건비, 임대료뿐만 아니라 잔반 처리와 설거지에 대한 비용까지 포함해서 지불한다. 내가 산 음식이다. 먹을지 남길지는 이 재화를 구매한 내가 정할 일이다.

손님이 식사를 남겨서 잔반 처리 비용이 발생할까 걱정이 된다면 (이미 많은 학생 식당과 구내식당이 시행하는 것처럼) 애초에 같은 가격을 지불하게 한 상태에서 밥의 양을 손님이 고를 수 있게 하거나 적게 잡은 정량을 똑같이 내준 뒤 메뉴판 등에 '필요시 밥을 더 준다'고 안내 문구를 써두면 될 일이다. 테이블에 착석하는 손님의 성별을 하나하나 확인해 음식량을 따로 담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며 누구의 반감도 사지 않아 고객 항의까지 방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경영 방법이다.  

내가 요식업을 해본 것도 아니면서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걸까? 글쎄… 정이니 센스니 하며 음식량으로 손님을 기만하지 않고 자신이 받은 가격만큼 공정히 상을 차려주시는 정직한 사장님들이 요식업계에는 훨씬 많으시며 장사도 잘만 하신다.

그리고 이 모든 걸 다 떠나서, 이 모든 상황에 대해 손님인 내가 불쾌하다. 굳이 내 돈 내고 밖에서 외식 하면서, 나도 모르게 더 비싼 돈을 내고 밥을 먹고 있었던 손님으로서, 가게 사정이며 경영인의 인생사며 가치관을 구석구석 선해해서 불만 없이 먹고 귀가해 불평도 하지 않고 남에게 추천도 하며 다시 찾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경영 비용 계산은 차가운 숫자의 세계다. 같은 돈을 받고도 성별에 따라 다른 양의 음식을 판매하는 사장님은 자신이 인심을 쓰고 있다는 아전인수에서 벗어나야 하며, 손님도 사장님이 '센스'있게 손님을 '배려'하고 있다는 과한 선해에서 벗어나 눈 뜨고 코 베이기를 멈춰야 한다. 

안 그래도 남자의 68.8%밖에 못 버는데
 

2021년 OECD 성별 임금 격차 그래프 ⓒ OECD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악이다. 1996년 OECD에 가입한 이래 내내 무려 26년째 성별 임금 격차 1위를 기록중이다. 남성이 100만 원을 받을 때 여성은 68만 8800원을 받는다는 의미다(OECD Gender Wage Gap, 2021). 성별 및 임신 출산 등에 따른 고용 차별, 노동의 질까지 따진다면 사태는 더욱 심각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렇게 임금을 덜 받는 여성이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자보다 더 많은 돈을 써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도 어떤 합리성이 끼어들 틈이 없다.

나의 머리 스타일은 평소 4mm 투블럭을 유지하고 있는데, 대다수의 미용실은 내 머리가 웬만한 남성보다도 짧음에도 부득불 '여자 커트' 가격을 받으려고 한다. 급할 때 어쩔 수 없이 불쾌함을 참으며 머리를 자르면서 '왜 여자 커트는 더 비싸냐'고 물어보면 여자는 머리가 더 길어서 디자인에 품이 많이 들어 어쩔 수 없단다. 지금 나랑 장난하나. 

몇몇 식당에서 밥을 먹기 위해 단위 가격당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안 그래도 임금 차별 때문에 남자의 68.8%밖에 못 버는데 온갖 곳에서 핑크 텍스(pink tax)까지 떼이느라 죽을 맛이다. 그런데 심지어 말 그대로 밥그릇까지 건드린다니. 해도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내게는 요즘 세상에 성차별이 어디 있냐는 황당한 질문을 들을 때마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몇 번으로 시작하냐는 대꾸 말고도 할 말이 늘었다. 똑같은 돈 내도 식당이 나한테는 여자라면서 밥을 더 적게 준다고. 이 원초적인 차원의 차별조차 보이지 않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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