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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경호하려다 53명 순직, 봉황새 1호작전의 진실

[TV 리뷰]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23.03.10 17:08최종업데이트23.03.10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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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되면 되게 하라.' 대한민국 대표 특수부대인 '특전사'를 대표하는 구호로도 익숙하다. 그만큼 불가능한 임무도 가능으로 만드는 것이 진정한 군인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쓰일 때만 가치가 있다.

3월 9일 방송된 SBS 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69회는 '수상한 비밀작전: C-123기 추락사건'편을 조명하며 무모한 명령을 지키려다가 희생당해야 했던 대한민국 군인들의 안타까운 일화를 조명했다.

1982년 2월 5일, 제주도 한라산에 위치한 어리목 관리소에서는 근무하던 청원경찰 양송남씨는 제주도청으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긴급전화를 받는다. 다음날 새벽에 청와대 경호팀이 한라산 등반을 할 예정이나 안내를 하라는 지시였다.
 
며칠 동안 계속된 폭설로 기후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 등산을 하겠다는 게 의아했지만 양씨는 일단 상부의 지시에 따랐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약속장소에 나와있던 것은 청와대 직원이 아닌, 대규모의 군인과 경찰들이었다. 양씨는 그제서야 일반적인 산행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지만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섣불리 질문조차 하기 어려웠다.
 
양씨는 한라산 등반에 대한 브리핑을 마치고 군경과 함께 산으로 올랐다. 이들의 진짜 정체는 청와대 경호팀이 아니라, 한라산에 추락한 비행기 사고 현장을 찾으러 온 수색대였다. 언론에는 아직 이 사실이 보도되지 않아 국민들은 비행기 사고가 일어난 줄도 모르고 있었다.
 
대원들은 한라산 수색 7시간 만에 중턱인 해발 1060미터 탐라계곡 개미목 부근에서 마침내 추락한 비행기를 찾아냈다. 충격적이게도 해당 기체는 뒤집힌 채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었고 양쪽 날개와 프로펠러는 산산조각난 상태였다. 그리고 주변에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신들로 가득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추락한 비행기는 군용기인 C-123으로 1960~1970년대부터 미국에서 주로 활용되었던 전술수송기였다. 해당 기체는 한라산 일대를 비행하다가 능선 어디인가를 들이받고 골짜기로 추락하면서 여러 차례 폭발한 것으로 추정됐다.
 
비행기 사고의 특성상 시신들의 상태는 너무나도 참혹했다. 양씨는 "온전한 시신이 거의 없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상황에 너무 막막하더라"고 그날의 참상을 떠올리며 씁쓸해했다. 사망자는 무려 53명, 생존자는 전무했고 희생자 전원은 모두 군인이었다. 수색대원들도 어제까지 동고동락하던 전우들의 비극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졌다.
 
현장 지휘관인 최 소령은 무거운 분위기의 대원들을 독려하며 시신을 수습할 것을 지시했고, 유일한 민간인 목격자인 양씨를 따로 불러 "오늘 목격한 일은 무덤까지 발설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휴대폰도 SNS도 없었기에 당국이 마음만 먹으면 외부로 알려지지 않는 일들도 많았던 시절이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었다. 당시 <제주신문> 사진부장으로 근무하던 언론인 서재철씨는 텔레타이프(수신신호가 인쇄문자로 기록되는 자동기기, 당시 연합통신 등에서 속보를 알리는 데 사용)를 통하여 '군용기 추락'이라는 짧은 속보를 접했다. 또한 이튿날 제주공항으로 취재를 나갔다가 고위급 인사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던 중에 '한라산'이 언급된 것을 엿들었다.

당시는 군당국조차 추락지점을 확실하게 파악 못 하던 시점이었지만, 서 기자는 언론인의 직감으로 정보들을 취합하여 군용기가 제주 한라산에 추락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취재에 나섰다.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1982년 당시는 언론도 통제가 일상이었다. 회사는 위험한 취재에 뛰어드는 것을 만류했지만 서 기자는 기자 정신으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서 기자는 단독으로 산에 올라 추락한 군용기를 발견했고, 일대를 통제하던 군인들을 따돌리고 현장을 촬영하는 데도 성공했다.
 
하지만 회사로 돌아온 서 기자는 당시 언론사마다 배치되어 있던 정권 측 주재원들에게 발각되어 결국 촬영 필름을 압수당했다. 서 기자는 위기의 순간에 그나마 기지를 발휘하여 필름 한 통을 몰려 빼돌려놓았다. 서 기자는 "만약에 그래도 무언가를 남겨둬야 할 것 아닌가. 언젠가는 쓰겠지 생각은 했지만, 언제 쓰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고 회상하며 미래를 기약했다.
 
물론 당시에도 이 사고가 내내 비밀에 부쳐진 것만은 아니었다. 얼마 뒤 신문과 TV 등 주요 언론에서 이 사건을 크게 보도하면서 '대침투작전 훈련 중 이상기류로 군용기 추락으로 전원 순직'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는 국방부의 발표 전문을 그대로 옮긴 내용에 불과했고 취재 내용이나 촬영된 사진은 전무했다. 정작 정부와 군당국은 희생자의 유족들에게는 언론에 보도될 때까지도 순직 사실조차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사망한 대원들의 정체는, 바로 대테러부대인 특전사 707특임대대 47명, 그리고 공군 대원 6명이었다. 유족들은 특수훈련도 견뎌낸 베테랑 정예요원들이 사고로 허무하게 몰살 당했다는 사실을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더구나 사고 당시가 훈련중이라고 했음에도 정작 군용기 내에서 필수적인 낙하산 장비도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유족들은 특전사령부를 찾아가 "무슨 훈련을 어떻게 받았길래 대원들이 다 사망했나?"라며 추궁했지만 군은 명쾌한 답변을 내놓지 못 하고 기다리라는 이야기만 반복됐다.
 
군의 무성의한 대응에 분노한 유족들은 급기야 돌발적으로 사령부 상황실의 유리를 깨고 안으로 쳐들어가 관련 서류를 수색하다가 한 장의 메모를 발견한다. 특전사령관이 707대대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훈련명칭을 '동계특별훈련'으로 변경하고 장병들에게도 고지하라고 지시하는 수상한 내용이었다. 왜 그들은 굳이 훈련명을 바꿔가면서까지 내용을 숨기려고 했던 것일까. 과연 순직한 대원들의 진짜 임무는 무엇이었을까.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사실 이들의 진짜 작전명은 바로 '봉황새 1호작전'이었다. 봉황은 청와대의 상징이고 이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바로 당시 제주공항 활주로 준공식과 연두순시를 위하여 제주도를 찾을 예정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호 작전이 순직한 대원들의 진짜 임무였던 것.
 
정부나 국방부의 발표와 달리 애초에 '대침투작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불미스러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가져올 후폭풍을 은폐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고 직전인 1982년 2월 5일 당시, 일선 부대에서는 기상악화로 비행기가 이륙하기 어렵다고 몇 차례나 건의했고 베테랑 조종사들도 무리한 비행을 모두 반대했지만, 상부에서는 이를 끝끝내 묵살했다고 한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부대의 구호처럼, 특전사 대원들은 목숨을 걸고 불가능한 임무를 가능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봉황새 1호작전의 최종결정권자이자 책임자는 군통수권자인 대통령, 바로 전두환이었다. 하지만 전두환은 본인을 경호하려다가 순직한 대원들의 사고 현장에서 "이번 사고는 조종사의 착각으로 빚어진 사고다. 인명은 재천인데 어떻게 하겠냐. 희생자의 명복을 빈다"는 충격적이고도 뻔뻔한 발언을 남겼다.
 
전두환의 최측근인 경호실장인 장세동은 평소 '심기경호'를 강조하며 보스인 전두환의 권위와 심기까지 세심하게 챙길 것을 강조했다. 전시상황도 아니었고 고작 연례행사에 불과한 연두순시를 위하여 전두환 정권이 무리해가며 봉황새 1호작전을 강행한 진짜 이유였다.
 
비극을 오롯이 감당해야 했던 것은 그저 임무에 충실하려다가 아깝게 순직한 이재훈 준위를 비롯한 53명의 707-공군 대원들, 그리고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남겨진 유족들이었다. 유족들은 군당국의 삼엄한 현장 제속에 진행된 영결식에서조차 먼 발치에서 고인의 유골함을 바라만 봐야 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영결식이 끝나고 비행기 사고가 대중들의 기억에서 조금씩 잊혀져갈 무렵, 서 기자와 유족들은 정권의 통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몰래 사고 현장을 찾았다.

유족들은 놀랍게도 그곳에서 아직 수습되지 못한 순직대원들의 유해를 대거 찾아냈다. 이재훈 준위의 누나 이재수씨 등 유족들은 사고로 훼손된 시신 일부가 군화나 베레모 안에서 발견된 참혹한 모습을 보고 큰 충격에 빠졌다. 전두환 정권은 사고 당시 눈에 띄는 유해 일부만 대충 수습하는 시늉을 하고 남겨진 유해 다수를 현장에 그대로 은폐-방치했던 것.
 
유족들은 결국 스스로 사고 현장을 뒤져서 고인들의 시신을 직접 수습하고 정성껏 화장하여 묘지 위에 뿌려줬다. 국가가 당연히 해줬어야 할 일을 유족들이 대신한 것이다. 하지만 군사정권의 통제와 감시로 이 사건은 당시만 해도 국민 대다수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988년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 운동으로 몰락하면서 유족회를 결성한 유족들은 단체행동에 나서서 봉황새 1호작전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국가 차원의 시신 수습을 요구했다. 그리고 서 기자는 그동안 고이 감춰둔 비행기 사고 현장의 유일한 자료인 필름을 공개했다. 하지만 5회에 걸친 탄원서 제출에도 정부는 묵묵부답이었다.
 
1989년에는 유족들이 전두환과 주영복 전 국방부장관, 이희근 전 공군참모총장들을 '권력남용에 의한 미필적 살인'혐의로 고발했다. 3년 만인 1992년 12월에야 나온 수사결과는 살인은 무혐의, 직권남용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되며 끝내 책임자 처벌은 아무도 이뤄지지 않았다.
 
유족들은 전두환 정권의 관련자들로부터 어떤 사과 한마디도 듣지 못 했다. 전두환은 2021년 사망할 때까지도 해당 사고에 대하여 아예 언급조차 없었다고 한다.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던 박희도는 2018년 인터뷰에서 당시 사건에 대한 질문을 받자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난다"고 답했다. 수많은 청춘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단 한마디의 사과조차도 그들에게는 그토록 어려운 일이었을까.
 
한라산 중턱에는 사고 당시 순직한 대원들을 기리는 충혼비가 건립되어 있다. 사고가 기억이 안 난다던 박희도는 정작 충혼비에 추모문구까지 적은 바 있다. 본래 충혼비에는 대원들이 대침투작전 중 순직했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나 2015년에야 대통령 경호작전 중 순직했다고 내용을 수정했다.

대원들을 기억하기 위하여 만들었다는 충혼비에서 정작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알리는 문구 한 줄을 수정하는 데만 무려 33년이 걸린 것이다. 그나마 유족들, 서 기자, 양송남씨 등 수많은 사람들의 포기하지 않은 노력이 있었기에 뒤늦게 진실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봉황새 1호작전은 대한민국 건국이래 전시를 제외하고 평시 작전 중 천안함 피격사건을 제치고 가장 많은 대원들이 순직한 비극적인 사고였다. 죽음을 각오하는 것은 군인의 숙명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희생이 당연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하는 대상은 오직 국가와 국민일 뿐 개인이나 권력자가 아니다. 53명 대원들의 숭고한 희생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 우리가 그날의 아픈 기억을 다시 되새겨야 할 이유다.
꼬꼬무 전두환 C123기추락사고 특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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