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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를 이긴 사랑... 소수자·철거민·이웃 다 모였다

[현장] 고 임보라 목사 추모문화제 가득 메운 시민들... '대관 불허' 한신대 규탄도

등록 2023.03.11 21:51수정 2023.03.11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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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후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열린 고 임보라 목사 추모제. ⓒ 김성욱


  
이동환 목사 : "몇 년 전 임보라 목사님이 이단 정죄를 받았을 때, 한 기자회견에서 연대 발언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저는 서슬 퍼런 교단이 두려워 차마 이름을 걸지 못하고 별칭을 달고 발언했다. 임 목사님은 제가 고마우셨는지, 안쓰러우셨는지, 끝나고 제 손을 꽉 잡아주셨다. 불과 1, 2초도 되지 않던 그 짧은 순간이 어찌나 강렬했는지..."

궁중족발 윤경자씨 : "임보라 목사님을 처음 만난 건 저희가 새로 바뀐 건물주와 분쟁 중일 때, 너무도 비현실적인 법과 제도로 인해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힘들 때였다. 그때 저 스스로 잊어가고 있던 떳떳함과 당당함을 일깨워주신 분이 목사님이셨다. 제가 힘들 땐 목사님께서 도움을 주셨는데, 저는 목사님 힘들 때 아무 도움을 못 드리고..."

강정개신교대책위원회 임왕성 목사 : "강정마을이 군인들에 의해 점령당하고 있을 때, 힘없는 주민들이 마을의 평화를 지켜달라고 아우성칠 때, 달려가는 그리스도인이 없었다. 그 무서웠던 전쟁터로 만사 제쳐두고 달려가 싸운 게 임보라 목사였다. 얼마나 격의 없이 지냈는지 강정마을 주민들은 임 목사가 목사라는 걸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강동구 반려견순찰대 이웃 박아무개씨 : "저는 부끄럽게도 보라님의 위대하고 따뜻한 행적을 몰랐다. 돌아가신 뒤에야 알았다. 제게는 그저 동네 이웃, 반려견 찹쌀이 엄마라고 부르던, 함께 강아지 산책하던 둘도 없는 벗이었다. 살아계실 때 보라님이 얼마나 외로우셨는지 알았더라면..."


11일 오후 4시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플라자 국제회의장. 성소수자 차별 반대운동 등 약자를 위해 앞장섰던 고 임보라 목사의 추모제가 치러졌다.

검은 옷을 입은 수백 명의 행렬이 이어졌다. 성소수자들이었다. 휠체어에 탄 채 보라색 꽃다발을 들고 참석한 장애인들이었다. 강제로 철거당한 철거민들, 제주 강정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시민들이었다. 동네에서 함께 반려견 순찰을 돌던 이웃들이었다. 빈자리 없이 회의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세 시간 가까이 진행된 추모제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안수경 한국기독교장로회 전국여교역자회 목사는 "여성 목회자들은 임 목사의 활동을 지지했지만 격려해주지 못했고, 어렵게 손 내밀어 연대를 요청했을 때 손 잡아주지 못했다는 자책과, 너무나 무거운 짐을 홀로 지게 했다는 자책으로 더욱 큰 슬픔 속에 있다"라며 "아픔이 있는 곳에서 우는 자와 함께 울며, 함께 웃던 고인의 삶을 기억하며 고마운 마음과 한 없이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으로 머리를 숙인다"고 했다. 시민들은 눈물을 흘렸다. 시민들은 임 목사의 기도에 따라 "살아남은 우리가 임 목사 몫까지 살아낼 수 있도록 도와달라"며 두 손을 모았다.


한신대, 임 목사 추모제 장소 대관 불허 논란... "뻔뻔한 혐오에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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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후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열린 고 임보라 목사 추모제. ⓒ 김성욱



임 목사 추모제는 시작 전부터 차별받아야 했다. 임 목사의 모교인 한신대학교가 추모제 중 성소수자 공연이 포함돼있다는 이유로 장소 대관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주최 측은 장소를 대관하려면 성소수자 무대를 축소하라는 한신대 측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 추모제 사흘 전인 8일 긴급히 장소를 서울여성플라자로 옮겨야 했다.

한신대학교 측의 성소수자 차별에 안팎으로 규탄 성명이 잇따랐다. 한신대학교 신학대학 학생회는 9일 입장문을 내고 "일부 선배들의 요청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문화제를 취소시킨 것이냐"라며 "우리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신학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냐"고 했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과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역시 10일 성명을 내고 "언제나 성소수자 교인과 함께 혐오에 맞섰던 임보라 목사님을 기억하는 자리에서, 뻔뻔하게 혐오와 차별을 요구한 학교 측에 깊이 분노한다"고 했다.

추모제 주최 측인 '우리 곁의 초록나무, 고 임보라 목사 추모문화제 기획단'은 "고 임보라 목사의 추모문화제에서 성소수자 관련 발언과 공연을 축소하거나 취소하라는 요구는 고인이 평생 실천해 온 뜻과 의지를 훼손하는 일"이라며 "대관 불허는 두고두고 한신대학교의 불명예로 남을 것"이라고 했다.

애도 넘어... "임 목사에 '이단' 결의한 예장통합에 취소·공식사과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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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후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열린 고 임보라 목사 추모제. ⓒ 김성욱



이날 추모제는 애도에서 끝나지 않았다. 시민들은 한목소리로 임 목사의 뜻을 이어받자고 기도했다. 한국예수교회연대 오현선 목사는 추모사에서 "저는 앞으로 보라님의 메시지를 기억하며 살아가려 한다"라며 "작은 몸짓에 불과하지만, 저는 임보라 목사님을 향해 이단성 결의를 한 예장(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에 그것을 취소하고 임보라 목사님과 가족에게 공식 사과할 것, 그리고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를 공식화한 일을 취소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임목사 사임서에 적어 지난주 제 소속 교단 노회에 제출해 교단 탈퇴의 공식적 절차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오 목사는 "교회는 자본에 잠식되고, 차별적 가부장 위계질서와 근본주의 신학을 갑옷 삼아 온갖 추한 폭력을 행사하며, 허울 좋은 개혁을 혀로만 놀리며, 그 속에서 꼼짝달싹하지 않고 있다"라며 "심지어 임 목사 추모문화제마저 두려워하는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나"라고 비판했다.

무대에 올라 추모 공연을 펼친 한 성소수자 역시 "퀴어 커뮤니티에서의 장례식장이나 슬픈 애도의 자리는, 꼭 슬픈 자리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라며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새롭게 고인의 뜻을 기리고,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결의를 다지는 자리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오늘 제가 부르는 노래가 그런 결의를 다지는 데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시민들은 '사랑이 이긴다'는 노래를 함께 부르며 울었다. '사랑이 이긴다/ 세상에 아무리 강한 혐오도 사랑이 이긴다/ 평화가 이긴다/ 세상에 아무리 강한 폭력도 평화가 이긴다/ 정의가 이긴다/ 세상에 아무리 강한 현실도 정의가 이긴다'라는 가사였다.

1993년 강남 향린교회 전도사부터 목회 활동을 시작한 임 목사는 '차별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교연대' 공동대표를 맡아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을 이끄는 등 성소수자 차별 반대에 앞장섰다. 임 목사는 <퀴어성서주석>을 번역해 발간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임 목사는 지난 2018년,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고신·합신 등 개신교 주요 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당했다. 임 목사는 지난달 4일 향년 55세로 별세했다.

다음은 이날 모인 시민들의 추모사를 정리한 것.

"강정마을에선 그저 잘 놀고, 주변 이웃들에겐 찹쌀이 보호자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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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후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열린 고 임보라 목사 추모제. ⓒ 김성욱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내 성희롱·성폭력 근절을 위한 대책위원회 이정규·이성철 : "연대할 때 우리는 변합니다. 초록나무라는 이름 그대로 늘 우리를 든든하게 품어주시고 나아갈 방향이 되어주신 임보라 목사님. 이제 우리가 그 의지를 따라 서로의 기도가 되고 용기가 되고 사랑하며 살아가겠습니다."

민숙희 대한성공회 광명교회 사제 : "저는 임보라 목사님의 강의를 듣고 처음 성소수자의 편을 드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분의 강의가 좋았다기보다 그분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내 마음에 오래오래 남아주세요. 당신이 하고자 한 일, 이제 나와 함께 합시다. 그래서 오늘 저는 안녕이라고 인사하지 않을게요."

강정개신교대책위 임왕성 목사 : "임보라 목사님이 강정마을 주민들이랑 얼마나 잘 놀고, 잘 마셨던지, 주민들이 나중에 목사인 걸 알고 배신감까지 느꼈다고 하더라고요. 오늘로 강정 싸움이 5777일을 맞았습니다. 강정마을을 기억하고 끝까지 함께 하는 것, 그것이 임 목사님께서 하늘에서 가장 기뻐하실 추모의 길이라 믿습니다."

궁중족발 윤경자씨 : "제가 본 목사님은 의로운 삶을 생각만 한 게 아니라, 몸소 실천한 분이셨습니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힘겨움도 아픔도 없이 평온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대한성공회 용산 나눔의집 원장사제 자캐오 신부 : "우리가 임 목사님을 생각하며 흘린 눈물들이 쌓여 이 세상을 뒤집어엎을 때까지, 우리들의 외침이 세상에 숨쉴 틈과 또 다른 길을 만들 때까지, 함께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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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후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열린 고 임보라 목사 추모제. ⓒ 김성욱



미국 장로교회 커트 에스링어 목사 : "임보라 목사가 가르쳐준 용기를 이어가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것이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더욱 열심히 연대하겠습니다."

이동환 영광제일교회 목사 : "임 목사님과 만난 곳은 대부분 거친 현장, 혐오의 한복판, 치열한 회의장이었지만 임 목사님이 계신 곳은 왠지 안전하게 느껴졌습니다. 임 목사님은 부당한 것, 특히 소수자의 인권이 침해되면 단호하게 바로잡으셨지만 상대를 비난하거나 악마화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위험한 곳에 있어도 임 목사님과 함께면 늘 안전한 공간이 확보됐습니다."

반려견 두리 보호자 : "제게는 임보라 목사님보다 찹쌀이 보호자님으로 더 익숙합니다. 함께 반려견순찰대 활동을 했는데, 소형견이 대부분이라 덩치가 큰 두리를 피했지만, 저와 두리에게 제일 먼저 그 따뜻한 미소와 목소리로 말을 건네주셨던 분이 찹쌀이 보호자님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살며 수많은 어른을 만났지만, 생각이 크고 마음이 넓은 어른이라고 느낀 분은 찹쌀이 보호자님이 유일하셨습니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사회적으로 아주 큰 일들을 해오신 위인이셨음을, 임보라 목사님이셨음을 알았네요. 아직도 동네를 걸을 때 목사님이 생각납니다. 이제 저도 목사님의 가르침 그대로 실천하며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관련기사] "우리가 제2의 임보라 목사"... 시민들 눈물 속에 떠난 성소수자의 벗 https://omn.kr/22n0j
 
#임보라 #추모제 #성소수자 #한신대 #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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