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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혁명 후 혁신계의 움직임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 31] 5대 선거에서 혁신진영은 무참하게 패배했다

등록 2023.03.21 15:27수정 2023.03.21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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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혁명 당시 모습. ⓒ 4.19혁명기념회

 
  4월혁명과 더불어 새롭게 나타난 가장 특별한 현상중의 하나는 혁신세력의 등장이었다. 혁신세력은 이승만 치하에서 불법화되고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처형하는 등 가혹한 탄압으로 오랫동안 동면상태를 유지해오다가, 4월혁명의 물결을 타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혁신정당 중에서 4·19 직후에 정당간판을 내걸고 7·29총선에 입후보자를 낸 곳은 사회대중당·한국사회당·혁신연맹 등이었다. 혁신정당의 재건을 목표로 구진보당 간부와 민주혁신당 일부가 결성한 사회대중당은 1960년 6월 17일 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서상일·윤길중 등을 간부로 선출하여 창당작업에 착수, 그해 11월 24일 출범했다. 

5대 선거에서 혁신진영은 무참하게 패배했다. 정원 233명의 민의원선거에서 사회대중당은 대구 을구의 서상일, 원성(原城)의 윤길중, 밀양 을구의 박권희, 남원 갑구의 박환생이 당선되었을 뿐이고, 한국사회당의 김성숙(金成淑)이 남제주에서 당선된 정도였다.

정원 58명의 참의원선거에서는 사회대중당의 이훈구가 충남에서, 한국사회당의 최달선이 경북에서, 혁신동지총연맹의 정상구가 경남에서 당선되었을 뿐이다.

민주당의 민의원당선자 175명, 참의원당선자 31명에 비하면 사회대중당은 민의원에서 44분의 1, 참의원에서 31분의 1밖에 차지하지 못하였으니, 선거결과를 분석해서 무슨 소용이 있으랴만은 그럴수록 혁신 진영은 더욱 굳게 단합하여 새로운 각오로써 그 체제정비를 기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전과 하등 다름없는 군웅할거 심리에 도취되어 있었으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주석 3)

4월혁명 후 재야 혁신세력의 최대 규모로 결성된 것이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이다. 1960년 9월 30일 사회대중당·한국사회당·혁신동지총동맹·천도교·유교회·민주민족청년동맹·4월혁명학생연합회 등 혁신계 정당과 진보적 사회단체가 연합하여 결성하였다. 

민자통은 자주·평화·민주의 3대 원칙 아래 남북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국민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구체적인 실현방안으로 △ 즉각적인 남북정치협상 △ 남북민족대표들에 의한 민족통일건국최고위원회 구성 △ 외세배격 △ 통일협의를 위한 남북대표자회담 개최 △ 통일 후 오스트리아식 중립 또는 영세중립이나 다른 형태의 선택여부 결정 등의 중립화통일안을 내세웠다.


이와 함께 학생들의 남북학생회담 제의도 적극 지지하면서 5월 13일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통일촉진 궐기대회'를 개최했다. 1만여 명의 시민·학생들이 참석한 이날 대회는 △ 남북학생회담 전폭적지지 △ 남북정치협상 준비 등 6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주석
3> 정화암,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 332쪽, 자유문고, 1982.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김자동 #김자동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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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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