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19 11:07최종 업데이트 23.03.19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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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문화진지, 독일 베를린에서 기증받는 베를린장벽. ⓒ 성낙선

 
평화누리 자전거길이 끝나는 지점인 '연천 역고드름'은 아주 외진 곳이다. 근처에 사람 사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만약에 역고드름까지 자동차를 타고 간다면, 꽤 애를 먹을 수도 있다. 역고드름 앞을 지나가는 길이 농로나 다름이 없다. 중간에 다른 차를 만나 교행을 해야 한다면 낭패를 겪을 게 틀림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대중교통 같은 건 지나다니지 않는다.

이런 곳에 자전거를 타고 왔으니, 이제 돌아갈 때도 자전거를 타고 가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제 곧 해가 질 시간이다. 이대로 계속 자전거를 타고 가다간, 아무것도 없는 들길 어딘가에서 밤을 맞을지도 모른다. 평화누리 자전거길 여행을 이런 식으로 종칠 수는 없다. 다행히 역고드름에서 강원도 철원 방향으로 3km 떨어진 곳에 '백마고지역'이 있다. 그곳에서 동두천역까지 버스를 타고 간다.

기차역에서 버스를 타다니 무슨 일인가 싶을 수도 있겠다. 예전엔 백마고지역까지 기차가 다녔다. 그러다 동두천역에서 연천역까지 전철화 공사가 시작되면서 2019년에 기차 운행이 중단됐다. 이후로 이곳에서 기차를 대신해 백마고지역과 동두천역 사이를 오가는 대체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이 대체 버스가 어떤 면에서는 기차보다 낫다. 다른 승객들 눈치를 보지 않고 짐칸에 자전거를 실을 수 있다. 요금은 전철보다도 싸다.
 

신천 자전거도로 위를 지나가는 자전거들. ⓒ 성낙선


동두천역에 내려서는 두 정거장 거리인 지행역까지 자전거를 타고 간다. 지행역에서는 자전거를 역 앞 자전거 주차장에 세워두고 홀가분한 몸으로 전철에 올라탄다. 자전거를 지행역에 두고 떠나는 건 나중에 이곳에서 다시 여행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동두천시에는 '신천'이 흐른다. 신천은 양주시 은봉산에서 발원해 북쪽으로 동두천시를 지나 연천군에서 한탄강과 합류하는 지방 하천이다. 신천 하천변으로 자전거 도로가 잘 닦여 있다.

이 자전거 도로가 남쪽으로 양주시 청담천과 덕계천을 따라가다가 의정부시 중랑천 자전거 도로로 이어진다. 나중에 지행역에서 시작하는 여행은 이들 하천을 따라서 서울로 되돌아가는 일정으로 짜여질 예정이다. 앞서 평화누리 자전거길을 여행하는 동안, 참으로 긴 '평화'를 누렸다. 그래서 지행역에 자전거를 세워둘 때까지만 해도 이후로 당분간은 평화라는 단어를 쉽게 접하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런데 평화는 '평화누리 자전거길'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두 마리 거북이와 하얀 모래사장

일주일 뒤 다시 지행역으로 돌아가던 날, 날씨가 또 한 번 요동친다. 요즘 날씨가 계속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은 형국이다. 하루 온도 차가 20도를 넘나들기도 한다. 신천으로 자전거를 타러 가는 날에도 한낮의 기온이 영상 20도 가까이 치솟는다. 이쯤 되면 초여름이나 마찬가지다. 날씨가 따듯해서 좋긴 한데, 과연 날씨가 이래도 괜찮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러다 나중에는 '봄이 실종됐다'는 말까지 나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신천 다리 밑 그늘 속을 지나가는 자전거. ⓒ 성낙선

 
신천 둔치 위로 한낮의 햇살이 따갑게 쏟아져 내린다. 신천 자전거 도로 위를 달리는 내내 그 햇살을 고스란히 받아 안는다. 금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둔치는 황량하다 싶을 정도로 넓다. 그 넓은 둔치에 그늘이 거의 없다. 다리 밑이 아니면 해를 피할 곳이 마땅치 않다. 쉼터나 나무 그늘이 아쉽다. 그래도 누군가는 그늘보다 햇살이 더 그리웠던 모양이다.

하천 수면 위로 무심코 던진 시선에 낯선 동물이 걸려든다. 거북이 두 마리가 작은 바위 위에 올라서서 해가 떠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바짝 쳐든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 모습이 마치 무슨 경건한 의식을 치르는 것 같다. 어디선가 국내 하천에 외래종 거북이들이 늘어 골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누군가 관상용으로 기르던 거북이들을 하천에 풀어놨는데, 그 거북이들이 수생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지적이다.

내 눈에 들어온 거북이들이 토종인지 아닌지 불분명하다. 거리가 멀어 확인이 어렵다. 하지만 해바라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토종과 외래종을 구분하는 일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외래종인들 제 고향을 떠나서 살고 싶었을까? 신천이 청담천과 만나는 지점에 넓은 백사장이 형성돼 있다. 그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인간사야 어찌됐든 거북이들에겐 일광욕을 즐기기 딱 좋은 날이다.
 

양주시 신천과 청담천 합류 지점에 펼쳐진 모래사장. ⓒ 성낙선

 
청담천은 자전거 도로가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도로가 깨끗하고 반듯하다. 요철이 거의 없어 승차감이 꽤 좋은 편이다. 청담천은 곧 덕계천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두 하천이 만나는 지점에서 준설 공사가 한창이다. 하천 바닥이 온통 파헤쳐져 여기저기에 모래 언덕이 쌓여 있다. 신천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풍경이다. 이곳에서는 물가에 외래종 거북이는 물론이고, 그 흔한 물새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수생 생태계를 파괴하는 주범은 따로 있다.

서로 다투어 피어나는 노란 봄꽃들

덕계천을 지나 중랑천까지 가는 길에서는 어디가 어딘지 잘 알 수 없는 길을 달린다. 여기저기 공사가 한창이다. 자전거 도로가 지나가는 길 주변으로, 아파트를 건설하는 공사와 택지를 조성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그 바람에 공사장 주변 하천들까지 몸살을 앓고 있다. 하천이 원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변형됐다. 다음에 다시 이곳에 오게 되면 완전히 다른 풍경을 보게 될 것 같다.
 

양주시 덕계천에서 하천 바닥을 파헤치고 있는 포클레인. ⓒ 성낙선

 

아파트 공사 주변, 자전거 도로는 끊어지고 하천은 형태가 사라지고 없다. ⓒ 성낙선

 
하천이 공사 중인데 자전거 도로가 멀쩡하게 남아 있을 리가 없다. 공사 현장 부근에서 사라진 자전거 도로를 찾느라 이리저리 길을 잃고 헤맨다. 그런 길이 덕계역 부근을 지날 때까지 계속된다. 이후에는 자전거 도로가 한동안 1호선 철길을 따라간다. 이 철길변 자전거 도로를 빠져나오면, 다시 하천변 자전거 도로로 이어진다. 바로 중랑천 자전거 도로다. 같은 하천인데도 중랑천은 앞서 보아온 신천이나 청담천, 덕계천과는 또 다르다. 하천 변으로 봄 냄새가 물씬하다.

천변 갯버들에 솜털 같은 버들개지가 무성하게 피어 있다. 물가 버드나무에는 벌써 푸른빛이 감돈다. 개나리도 꽃망울이 노랗게 부풀어 오르고 있다. 일부는 이미 꽃을 피웠다. 봄은 중랑천으로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 옷차림에서도 볼 수 있다. 밝고 가벼운 옷차림이 대부분이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중에는 반바지에 반팔 차림도 있다. 천변 잔디밭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고 나물을 뜯고 있다.
 

중랑천변 화사하게 꽃을 피운 버들개지. ⓒ 성낙선

 

중랑천 둔치에서 봄나물을 뜯는 사람들. ⓒ 성낙선

  
봄은 남쪽에서부터 올라온다. 중랑천에서도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봄빛이 더 짙어진다. 도봉산역과 중랑천 자전거 도로 사이에 '창포원'이 있다. 제방 위로 올라가 자동차 도로를 건너가면 바로 창포원이다. 창포원으로 들어서자마자, 산책로 옆으로 홀로 서 있는 생강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가지에 듬성듬성 노란 꽃을 매달고 있다. 생강나무꽃을 꽃송이만 보고는 산수유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세히 보면 꽃송이가 산수유보다는 더 몽실몽실하다. 

수형을 보면 구분이 더 잘 된다. 생강나무는 땅 위 줄기가 여러 개인 관목이거나 키가 작은 소교목 형태이고, 산수유는 중심 줄기 하나가 굵고 곧게 자라는 교목 형태이다. 생강나무는 가지를 꺾어 냄새를 맡아보면, 생강 냄새가 난다. 생강나무꽃은 초봄에 강원도 산골에서 보는 봄꽃 중에 하나다. 서울에서는 생강나무꽃을 보는 게 쉽지 않다. 창포원에서도 산수유꽃이 더 많이 눈에 띈다. 그 꽃들 어딘가에 생강나무꽃이 숨어 있다.
 

서울 창포원의 생강나무꽃. 벌 한 마리가 꿀을 빨고 있다. ⓒ 성낙선

 

서울 창포원의 산수유꽃. ⓒ 성낙선

 
대전차 방어벽 뒤에 '베를린 장벽'이

창포원 옆으로 아이들 웃음소리가 소란스럽다. 그 소리만 들으면 무슨 유원지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주변에 탱크와 장갑차 같은 군사 장비들이 전시돼 있는 걸로 봐서는 꼭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시끌시끌한 소리를 따라서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예상 밖의 세계가 펼쳐진다. 잔디밭 위로 돗자리들이 펼쳐져 있다. 그 주변으로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다닌다.

이곳에는 '평화문화진지'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2010년대 중반 지자체와 관할 군부대가 협의해, 그때까지 '대전차 방어벽'으로 남아 있던 군사 시설을 개조해 시민들을 위한 문화 창작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대전차 방어벽 앞쪽으로는 '평화울림터'라는 이름의 야외 공연장을 만들고, 대전차 방어벽 벽면에는 평화를 주제로 한 그림을 그려 넣었다. '전쟁'을 상징하는 대전차 방어벽을 '평화'를 상징하는 장소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평화문화진지 내 대전차 방호벽 일부. 2016년 지자체와 관할 군부대 사이에 방호시설을 리모델링하는 협약이 체결되면서, 시민 문화 창작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방호벽 아래로 보이는 것은 야외공연장인 '평화울림터'이다. ⓒ 성낙선

 
대전차 방어벽 뒤쪽에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져 있다. 그곳에서 세 조각으로 나누어져 있는 낡은 시멘트 벽을 마주한 순간, '설마 진짜는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앞선다. 베를린에 있어야 할 장벽을 서울 도봉구에서 봐야 하는 게 의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장벽이 모형이 아닌 진짜 베를린 장벽이란다. 안내판에 "독일 베를린시로부터 기증받은 3점의 장벽을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이곳 도봉구에 세운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 '벽'을 보면서,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다른 '벽'을 떠올린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린 게 언제 적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베를린 시민들이 직접 장벽을 부수기 시작한 게 1989년이니까, 그새 벌써 3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가 이룬 건 무언가? 대전차 방어벽이 문화진지로 바뀐 걸 보고 흐뭇해 하다가, 베를린 장벽을 보고 나서는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을 아프게 되짚는다. 아직도 '전쟁 불사'를 외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평화'를 뒤로 하고, 도봉산역을 떠나서는 석계역까지 달린다. 내친김에 바로 한강까지 달려가고 싶지만, 몸이 지쳐서 그 이상 가기 힘들다. 석계역에서 전철을 기다리는데, 애써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숫자가 다시 고개를 든다. '34년'이면... 어떤 장벽이든 너끈히 무너뜨리고도 남을 충분한 시간이다. 이날 동두천시 지행역에서 서울시 석계역까지 달린 거리는 약 38km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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