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17 17:59최종 업데이트 23.03.17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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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멕시코 황제 ⓒ 위키피디아


"멕시코인들이여! 나는 멕시코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정당한 대의 아래 죽는다! 지금 흐를 내 피가 이 땅의 마지막이 되기를! 멕시코 만세!"

1867년 6월 19일 새벽 멕시코 케레타로시가 한눈에 보이는 세로 데 라스 캄파니스 언덕은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제복을 입고 오와 열을 맞춰 서 있는 군인들 뒤로 수척하지만 멋진 수염을 가진 한 남자가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군인에게 금화를 쥐여주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새벽 기운 뒤로 드리운 태양은 흐릿했던 총열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남자를 향한 총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언덕을 뒤흔든 총성과 함께 멕시코의 마지막 황제는 이슬로 사라졌다.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와 이탈리아 통일을 이끈 가르발디, 심지어 프로이센 총리 비스마르크도 멕시코 정권을 잡은 후아레스 대통령에게 그의 석방을 탄원했다. 하지만 외세에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고자 했던 후아레스는 법원의 사형 판결을 그대로 따랐다. 

차디찬 새벽 멕시코 언덕에서 생을 마감한 남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동생 막시밀리안 1세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으로 한때 오스트리아 제국 해군 총독이었던 그는 1864년 4월 멕시코 제2 제국의 황제가 됐다.

유럽 대륙과 멀리 떨어진 멕시코 황제로 막시밀리안을 추대한 것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아닌 나폴레옹 3세였다. 오래전부터 멕시코를 손에 넣고 싶었던 프랑스의 꿈을 위해 나폴레옹 3세는 조카를 이용했던 것이다.  

멕시코에서 인도 제국 꿈꾼 프랑스

1815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승리한 러시아,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빈에 모여 프랑스에 막대한 배상금을 청구하며 전리품을 나눠 갖는다. 빈 체제로 불리는 이 회의는 외형적으로는 상호견제를 통해 균형을 확보하고 동맹을 통해 안정을 꾀하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자유주의 확산을 경계하고 프랑스혁명 이전의 질서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했다.  

1818년 배상금을 모두 갚은 프랑스는 외국 군대가 모두 철수하자 힘을 되찾기 시작했다. 1823년 샤를 10세가 다른 국가들의 동의 없이 스페인 반란을 진압하자 유럽 전체가 술렁였다. 스페인 자유주의자들이 부르봉 왕가 출신인 페르디난트 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자 즉시 개입해 진압한 프랑스는 옛 스페인 식민지에도 손을 뻗기 시작했다. 

이런 프랑스의 움직임에 독일연방과 영국 그리고 미국은 위협을 느꼈다. 프로이센을 비롯한 바이에른, 작센 등 독일연방은 프랑스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통일을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고 영국과 미국은 남미 스페인령이 프랑스로 넘어가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샤를 10세가 1830년 7월 혁명으로 폐위되고 루이 필립 1세가 입헌군주로 등장하는 등 혼란한 시기를 맞았지만 프랑스는 옛 스페인 점령지, 특히 멕시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1838년 일어난 페이스트리 전쟁은 프랑스에 멕시코 진출을 위한 좋은 계기였다.  

스페인 식민 시대부터 멕시코와 교류한 프랑스는 19세기 들어 세 번째 교역 국가로 성장했다. 프랑스와 멕시코의 분쟁은 멕시코시티 외곽 페이스트리 가게가 발단이었다. 프랑스 출신 제빵사 레몬텔은 매장이 강도를 당하자 멕시코 정부에 조사와 보호를 요청했다. 공무원들이 오랫동안 외상으로 빵을 구입한 대가도 요구하며 보상금으로 6만 페소를 요구했다. 굉장히 무리한 요구였기 때문에 정부가 들어줄 리 만무했다.  

멕시코 정부의 대응에 화가 난 레몬텔은 마침내 본국에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마침 프랑스인이 해적으로 몰리며 사형당하는 일도 일어나자 프랑스는 주저하지 않고 군함을 이끌고 멕시코로 진격했다. 

1838년 11월 프랑스는 멕시코 베라크루스 항구를 점령하고 모든 물자를 봉쇄했다. 멕시코는 1년 동안 버텼지만 결국 불평등 조약에 서명하며 항복했다. 그 대가는 60만 페소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실질적으로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프랑스는 합의했다. 23년 뒤 이 돈이 멕시코 제2 제국을 세우는 불씨가 될 것을 예상했던 것일까?  

멕시코 황제가 된 오스트리아 황제의 동생
 

베니토 후아레스 멕시코 대통령 ⓒ 위키피디아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긴 했지만 멕시코를 파탄으로 이끈 건 미국이었다. 19세기 중반만 하더라도 지금의 캘리포니아와 텍사스는 멕시코 영토였다. 멕시코가 프랑스 영토가 되는 건 미국 입장에서 최악의 상황이었다. 결국 미국은 1848년 멕시코와의 전쟁을 통해 캘리포니아와 텍사스를 탈취한다. 

미국에 영토를 잃은 멕시코는 경제적으로 큰 위기에 봉착했다. 1857년 대통령이 된 자유주의자 베니토 후아레스는 개혁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토지개혁을 시행하고 교회 재산을 몰수하며 성직자와 토지 귀족의 특권을 제한했다. 이런 정책은 보수파의 강력한 반발을 불렀고 멕시코는 3년간의 내전에 들어갔다. 

여기서 후아레스는 악수를 두게 된다. 보수파와의 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미국을 끌어들인 것이다. 그는 1859년 미국인과 미국 상품이 멕시코 영토를 영구적으로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다는 멕레인-오캄포 조약을 제안하며 거래를 했다. 이 조약은 남북전쟁으로 미국 상원에서 비준되지 못했지만 미 해군은 후아레스를 지원했다. 

후아레스는 내전에서 승리하지만 외세에 의존하는 반동적 결정은 멕시코의 미래를 어둡게 했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법, 보수파는 후아레스에 대항하기 위해 유럽을 끌어들이기로 결정하고 프랑스에 접근했다. 쿠데타를 통해 프랑스 황제가 된 나폴레옹 3세는 마침 내부적인 불만을 해외로 돌리고자 했고 멕시코 보수파의 제안은 달콤했다. 오래전부터 멕시코를 먹고자 했던 프랑스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후아레스 정권은 미국의 군사적 도움으로 권력을 잡았지만 경제적으로는 궁핍했다. 1861년 외채 상환에 대해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자 채권을 쥐고 있던 프랑스, 영국, 스페인은 멕시코로 군대를 파병했다. 영국과 스페인은 프랑스와 보수파의 결탁을 파악한 후, 멕시코에서 손을 뗐지만 프랑스는 후아레스를 몰아내고 프랑스 괴뢰 정부를 수립했다.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을 대신할 꼭두각시가 필요했고 멕시코 제2 제국의 황제로 점찍은 사람이 조카였던 막시밀리안이었다. 

막시밀리안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동생으로 해군 총독을 통해 지도력을 겸비한 청년이었다. 오스트리아 황제 자리에 오르지 못할 것이 확실시되자 그는 나폴레옹 3세의 제안을 받아들여 멕시코로 향했다. 그에게는 멕시코 황제가 유일한 희망으로 보였을 것이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에두아루 마네는 그림 속에 총을 쏘는 군인들을 프랑스 군으로 묘사하며 나폴레옹 3세를 조롱했다. ⓒ 위키피디아


1864년 멕시코 제국의 황제를 수락한 막시밀리안은 보수파의 의도와 달리 후아레스의 정책을 이어갔다. 원주민의 권리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을 제정했고 학교도 설립했다. 몰수된 교회 재산은 돌려주지 않았으며 세금과 토지 개혁도 추진했다. 이런 정책과 성향은 이탈리아 총독 시절 주둔지를 다스렸던 경험에서 나왔다. 

순진했던 것일까? 아니면 아둔했던 것일까? 비정한 정치판에서 순수한 열정과 선진적인 정책 그리고 공정한 실현이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것일까? 하지만 오랜 기간 스페인의 식민 통치를 경험했던 멕시코인은 오스트리아인 황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를 끌어들인 보수파도 등을 돌렸다. 

게다가 1865년 남북전쟁을 끝내고 정신 차린 미국이 프랑스가 세운 괴뢰 정권을 가만둘 리 없었다. 미국은 후아레스를 지원하며 막시밀리안을 공격했다. 나폴레옹 3세에게는 유럽과 미대륙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먼로 독트린을 들이대며 멕시코에서 퇴각하라고 경고했다.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통일을 준비하는 프로이센이 부담스러웠던 나폴레옹 3세는 미국의 경고를 받아들였다. 1866년 프랑스는 멕시코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막시밀리안이 프랑스 군대 지원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멕시코 황제 자리에서 내려와 유럽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받았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자신을 따르는 멕시코 민중들을 버릴 수 없다는 핑계를 댔지만 아마 무너지는 자존감을 견디기 힘들었으리라. 황제로 목숨을 잃는 것이 더 명예롭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1867년 5월 15일 케레타시는 함락되고 막시밀리안은 후아레스에게 생포된다. 6월 13일 재판이 진행됐고 사형이 선고됐다. 그리고 6월 19일 새벽, 총탄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멕시코 만세를 외치며 담담히 죽음을 맞이한 젊은 황제는 유럽 어떤 황제보다 어리석었지만 순수했다. 

멕시코에 살아있는 비엔나 라거
 

네그라 모델로 ⓒ 그루포 모델로


막시밀리안은 사라졌지만 맥주를 남겼다. 멕시코 맥주는 막시밀리안 시대 오스트리아에서 건너온 양조사들로부터 시작됐다. 1860년대 이들이 멕시코 땅에서 시작한 맥주가 비엔나(빈) 라거다. 

비엔나 라거는 1840년 안톤 드레허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시한 맥주다. 뮌헨 슈파텐 브루어리의 가브리엘 제들마이어 2세, 칼스버그의 야콥 야콥센과 라거의 아버지로 불리는 안톤 드레허는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라거를 개발했다. 

영국 에일에 필적할만한 맥주를 만들기 원했던 드레허는 도르트문트에서 나오는 짙은 황금색 라거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빈의 물은 밝은색 맥주에 적합하지 않았다. 단단한 물, 즉 경수였던 빈의 물은 어두운색을 띠는 맥주에 어울렸고 수차례 도전 끝에 짙은 갈색을 품은 비엔나 라거가 탄생했다. 

비엔나 라거의 특징은 몰트에서 올라오는 캐러멜과 토피와 같은 향이다. 5~5.5% 알코올과 부드러운 바디감은 몰트 향과 어울려 음용성과 복합성을 높여준다. 어두운색을 갖고 있지만 둔켈보다 가볍고 우아하다. 낮은 쓴맛과 섬세한 단맛은 균형감의 절정을 보여준다. 

비엔나 라거는 독일 맥주에도 영향을 끼쳤다. 1870년 독일 뮌헨에서 옥토버페스트 맥주로 출시된 메르첸은 비엔나 라거의 후손이다. 그러나 비엔나 라거는 20세기를 거치며 자취를 감춘다.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오스트리아 양조 산업이 파괴됐고 뮌헨 맥주와의 경쟁에서 뒤처지며 비엔나 라거는 오스트리아에서도 쉽게 마실 수 없는 맥주가 됐다. 

유럽에서 사라진 비엔나 라거의 원형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멕시코다. 네그라 모델로는 비엔나 라거의 DNA를 지금까지 간직한 유일한 맥주다. 1860년대 막시밀리안 황제와 함께 멕시코로 이민 온 오스트리아 양조사들은 비엔나 라거의 DNA를 멕시코 맥주에 심었다. 20세기까지 이런 전통은 이어졌다. 1922년 설립된 멕시코 대표 맥주 브랜드 그루포 모델로는 1926년 비엔나 라거 네그라 모델로를 세상에 내놓았다. 

5.4% 알코올, 멋들어진 앰버색을 띠는 네그라 모델로는 사라진 비엔나 라거의 적통자다. 비강을 물들이는 섬세한 캐러멜과 견과류 향은 섬세한 쓴맛과 만나 최고의 기품을 선사한다. 입안을 채우는 부드러운 바디감은 우아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균형감이 좋아 마시기 편하며 목 넘김이 깔끔해 부담이 없다. 몇 년 전만 해도 한국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볼 수 없어 아쉬울 뿐이다. 

35년의 짧은 생을 살다 간 멕시코 마지막 황제. 그가 없었다면 오스트리아 비엔나 라거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었을 것이다. 사라진 오스트리아 맥주가 지구 반대편 멕시코에서 살아있을 줄이야. 격동의 역사 뒤로 맥주는 흐른다. 그렇게 고고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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