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땅 최초의 스케이팅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숭례문 앞 연지를 복원하자

등록 2023.03.20 14:03수정 2023.03.20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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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한반도 땅에서 최초로 스케이트를 탔던 사건은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서 일어났던 것일까요? 그걸 내가 알지 못하면 누가 알겠습니까? 그 주인공이 바로 나, 조지 포크입니다.


나는 1885년 새 해 정초에 숭례문 바로 바깥에서 얼어붙은 연못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못을 사람들은 연지(蓮池)라 부르더군요. 나는 그날 저녁 늦게 스케이트를 가지고 호위병 한 명과 함께 연지로 갔습니다. 

​갑신정변으로 민심이 흉흉하던 때였습니다. 주위를 살핀 후 나는 가만히 연못에 들어가 스케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신나게 연못을 한 바퀴를 돌있지요. 그런데 아뿔싸,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들리지 않겠어요.

"원! 이-이-런 체미! (Won! i-i-ron-chemi!)"

나를 두고 하는 소리였어요. 빙판 위로 몰려들기 시작한 사람들이 10여 분이 지나자 눈덩이처럼 불어나 수 백 명의 군중으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나를 완전히 에워쌌습니다. 

"안녕하세요. 날씨가 춥네요..." 내가 조선말로 인사를 건네자 그들의 놀란 눈은 더욱 커졌습니다. 놀람과 호기심으로 타오르는 눈동자들이 어둠 속에서 형형히 빛났습니다. 난생 스케이트라는 물건을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었던 그들은 빙판을 날아다니는 나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이게 도깨비 귀신이 아니면 다른 무엇이겠느냐라고 생각했다더군요.


​군중의 시선은 나의 발, 아니 스케이트에 꽂혔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스케이트 타는 법에 대해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내가 아는 모든 조선말을 동원하여 손짓 몸짓을 섞어가며 진행했지만 그들을 이해시키기란 정말 어려웠습니다.

몇 차례 멋진 스케이팅을 시연해 보이자 그들은 소리를 질러대고 환호하고, 발을 굴러대고... 그런 난리 법석이 없었답니다. 그 스케이트의 브랜드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Acme'(절정)이었답니다. "제미랄 희한방창하네. 어떻게 저게 다리에 저렇게 꽉 붙어 있지." 사람들의 웅성 거리는 소리에 나는 스케이트를 벗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돌려가며 살펴보라고 했습니다. ​

눈을 번뜩이며 뜯어보는 조선인들의 인상이 강렬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스케이트 만드는 법을 열심히 설명해 주었지요. 그들의 눈썰미로 보아 머지 않아 직접 스케이트를 만들어 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들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나는 "빙판이 너무 거칠어 스케이트 타기에 그리 좋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다시 스케이트를 들고 연못을 찾았습니다. 소문이 순식간에 퍼졌는지 이천 명 가량의 구경꾼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나는 그때 결코 잊지 못할 진퐁경을 목도했습니다. 사람들이 ​대패와 도끼를 가져온 거였어요.

그런 연장을 손에 들고 그들은 연못 전체를 돌아다니며 울퉁불퉁한 표면을 다듬고 튀어나온 돌기들을 깎아내는 거였습니다. 그런 광경에 과연 누가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조선인에 대한 나의  치명적인 애정은 어쩜 그때 가슴 속에 자리잡았던 게 아닌가 합니다. 

그 뒤로 많은 조선인들이 나를 찾아와 다시 한 번 스케이트 타는 것을 보여 달라고 졸랐답니다. 한국 스케이트 역사의 첫 장은 그렇게 열렸다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고지도에서 한양 성곽 밖에 동지東池, 서지西池, 남지南池 등의 큰 연못을 찾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 연못들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조정에서 직접 조성하여 일반인에게 개방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스케이트를 탔던 남지는 숭례문 밖 두 갈래의 대로 사이에 위치했는데 연꽃으로 유명했습니다.

1433년 세종 임금 때 도성 석축 공사와 함께 만들어진 이 연못은 행인들이 북적대는 장소에 위치하고 있고 주변에 넓은 공간이 이어져 있어서 각종 행사와 모임을 갖기에도 안성마춤이었지요. 특히 여름철에는 연꽃을 감상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만개한 연꽃으로 수놓인 아름다운 정경을 시인묵객들은 즐겨 노래하고 그렸습니다.

이제 타임머신을 타고 연지를 방문해 봅시다. 1500년대에 그곳을 방문한다면 이런 모습에 도취될 것입니다.

'남지에 물 가득해 푸른 물결 찰랑대고 만 송이 붉은 구름 이슬 젖어 산뜻하네. 홀연히 맑은 바람 말 머리에 불어옴에 취한 옷에 종일토록 연꽃 향기 배어 있네'
- 김성일(金誠一, 1538∼1593)


하지만 그로부터 200년이 흐른 뒤 18세기 어느날 이곳을 찾는다면 물이 말라버린 쓸쓸한 공터만 남아 있을 겁니다. 백성들이 스스로 비용을 마련해 못을 원래대로 다시 파내고 물을 채운 것은 1823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66년 후인 1896년 우리가 이곳을 방문한다면 연못에서 눈부신 고니(백조)가 한가로이 떠 있는 모습을 감상할 것이고 이태 후인 1898년 12월 1일 이곳을 방문한다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장례식을 볼 것입니다. 장례식 광경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얼마 전에 죽은 한 사나이의 운구가 연못가에 당도하자, 천막을 높이 치고 그 밑에 영구를 안치한 다음 오후 1시부터 노제路祭를 지내기 시작합니다. 먼저 영어학교 학생들이 제문을 지어 읽고 뒤를 이어 부인회 회원들이, 또 그 뒤로는 사립흥화학교私立興化學校 교사들이 제물을 성대하게 준비하고 제문을 지어 올립니다. 그 다음에는 이화학당 여학생들이 찬미가를 불러서 많은 시민들을 더욱 감동시킵니다.  

장례식의 주인공은 김덕구金德九라는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명동거리에서 신발을 수선해 주며 생계를 이어가던 그는 비록 천민이었지만 애국애족정신이 투철하였습니다. 망해가는 조선을 구하고자 만민공동회에 뛰어들었던 그는 풍찬노숙을 하며 국정개혁을 외쳤습니다. 그러던 중 11월 21일 수구단체인 황국협회와 맨주먹으로 싸우다가 목숨을 빼앗기고 맙니다.  

12월 1일 아침부터 도로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구름같이 모여서 김덕구 만민장의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상여 앞에는 '大韓帝國義士 金公德九之柩대한제국의사 김공덕구지구'라고 크게 쓰인 명정이 드높았고, 상여 뒤로는 김씨의 부인이 뒤따랐으며, 다시 그 뒤로는 각 학교와 각 동리의 명패를 높이 세운 시민들과 학도들이 따랐습니다.

인파가 길을 가득 메운 가운데 외국인들도 이 기관奇觀을 놓칠새라 거리로 나왔습니다. 남대문 밖 이문골에 사는 소년들은 자동의사회子童義士會라는 어린이단체를 조직하고 장례식장에서 애국연설을 토하여 사람들을 울음 바다로 만들기도 하였지요.  

김덕구 장례식으로부터 꼭 10년 후 연지를 방문해 본다면 연못이 매몰되어 버리는 씁쓸한 광경을 목도할 것입니다. 1907년 일본 황태자 방한을 추진하면서 남대문 일대를 정비할 목적으로 성벽처리위원회가 개설되었습니다. 그들은 남대문 문루는 남겨둔 채 좌우 성벽을 헐어 폭 8칸의 새 도로를 만들었습니다. 1908년 9월에 완료된 이 공사로 인해 연못이 매몰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지금은 연지 옛터에 고층 건물이 들어서 있을 겁니다. 나, 조지 포크는 묻고 싶습니다. 1433년 세종의 뜻으로 만들어진 후로 475년 동안 존속되었으나 일제에 의해 매몰되어 버린 역사. 문화의 공간, 백조가 노닐고 연꽃이 아름다웠던 도심 속의 연못,  조선인들이 처음으로 스케이트를 알게 되었던 그 곳, 신발 수리공  김덕구의 애국애족 정신을 만민이 기렸던 그 연못을 복원해야 하지 않을까요?
#조지 포크 #연지 #스케이트 #김덕구 #만민공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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