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20 11:54최종 업데이트 23.03.20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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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6일 오후 일본 도쿄 긴자의 오므라이스 노포에서 친교의 시간을 함께하며 생맥주로 건배하고 있다. ⓒ 연합뉴스

 
16일 한일정상회담 뒤의 두 번째 식사 자리에서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러브샷으로 폭탄주를 마시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일본 맥주에 한국 소주를 탄 '소맥'을 맛본 그는 "한일 우호의 맛이 진짜 맛있다"라며 감동을 표출했다.  

두 사람의 회담에서 강제징용(강제동원)에 더해 위안부 문제와 독도 영유권까지 거론됐다는 보도가 그날 밤 일본에서 나왔다. NHK는 기시다 총리가 독도에 관한 자국의 입장을 윤석열 대통령에게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총리를 보좌하는 기하라 세이지 내각관방 부장관도 그날 밤 기자들에게 "독도 문제가 포함됐고, 위안부 합의에 대해 착실한 이행을 요구했다"는 입장을 언론사 기자들에게 밝혔다.


이런데도 대통령실은 "독도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라고 선을 그었다. 뒤이어 박진 외교부 장관은 18일 KBS 방송에서 '의제로서'라는 단서를 붙이며 "의제로서 논의된 바 없다"라고 발언했다. "기시다 총리가 그 부분에 대해 말을 꺼냈다고 받아들여도 되겠나?"라는 질문에 대해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답했다.

같은 날 YTN에 출연한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은 "현재 우리가 점유하고 있는 땅"이라며 "일본 당국자가 우리에게 독도 얘기를 한 기억이 없다"라고 답했다. '얘기를 하지 않았다'라고 확실히 말하지 않고 '기억이 없다'는 화법을 구사했다.

2021년 11월 16일 김창룡 경찰청장의 독도 방문을 계기로 대응 수위를 한층 높인 자민당 정권은 그달 24일 'TF 대응팀을 구성한다'는 자민당 결정을 도출했다. 이 팀이 2022년 여름까지 새로운 대응책을 내놓으리라는 일본 보도가 그 뒤 계속 나왔다.

이처럼 자민당 정권은 독도와 관련해 잔뜩 벼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한 회담이 지난 16일 있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독도가 거론됐다고 일본 정부 관계자와 일본 언론이 확인해주었다.

이런데도 대통령실은 '전혀 없었다'라고 말하고, 박진 장관과 김태효 차장은 여지를 남기는 답변을 내놓았다. 강제징용에 이어 독도와 위안부 합의에 대해서까지 국민적 우려를 낳을 만한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1965년에도 비슷한 우려

지금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됐던 1965년 한일협정(한일기본조약+부속협정) 당시의 우리 국민도 비슷한 염려를 품었다. 사과·배상 없이 관계정상화를 추진하는 박정희 정권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들의 의심이 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박 정권이 한·일 간의 핵심 현안을 밀약 형태로 은밀히 체결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대신이 청구권에 관한 밀약을 각서로 남긴 사실이 1964년 12월 야당 의원들에게 알려지고 뒤이어 국민들의 시위 현장에서 김·오히라 각서를 성토하는 구호가 나오던 시절이었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양국 민사 채권 관계를 유·무상 경제협력 자금 및 상업 차관으로 처리하되 지급 명목을 정하지 않은 김·오히라 각서는 1965년 6월 22일의 한일청구권협정에 거의 그대로 반영됐다. 금액 조정만 있었을 뿐이다.

지급 명목을 정하지 않은 이 방식을 이용해 당시의 일본은 독립 축하금으로 주는 돈이라고 주장했고, 지금의 일본은 강제징용·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준 돈이었다고 둘러대고 있다. 실제로는 일반 민사 채권 관계를 정부 차원에서 더 이상 문제 삼지 않는 조건으로 지급하는 돈이었다.

핵심 쟁점인 청구권 문제를 김·오히라 각서라는 밀약 형태로 합의한 사실을 알게 된 국민들은 '독도는 과연 무사할까'라는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독도마저 어떻게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은 당시 상황에서는 매우 합리적이었다.

그해 3월 20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일 굴욕외교 성토 강연회'에서는 '박 정권이 독도를 팔아먹고 있다'는 주장들이 쏟아져나왔다. 쌀쌀한 봄 날씨였는데도 이날 서울운동장에는 약 3만 명이 운집했다.

이 집회에서는 "박 정권의 태도는 굴욕적인 단계를 지나 매국적인 단계에 이르렀다"는 규탄이 나왔다. 독도까지 넘기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퍼져 있었으니 '매국적'이라는 비판은 이 시점에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다. 강연회에 뒤이어 거리 시위가 이어졌고, 5백여 명의 경찰 병력이 해산 작전에 투입됐다.

민주당 소속인 41세의 김대중 의원도 5월 7일 국회에서 이 문제를 따지고 들었다. 그날 발행된 <경향신문> 기사 '득·실 명백한 답변을'에 따르면 김대중은 "독도 문제가 정조인과 결부, 처리될 것인가", "가조인된 내용대로 정조인할 생각인지를 명백히 답변하라"라고 요구했다. 독도에 관한 언급이 없는 상태로 가조인된 한일협정 문안을 정식 조인 때도 그래도 유지할 것인지, 정식 조인 때 독도 영유권 규정을 새로 넣을 것인지를 명백히 하라고 주문했던 것이다.

국민들이 독도에 관한 이면 합의를 의심하는 이런 상황에 대해 박 정권은 '터무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해 4월 14일 자 <동아일보> 톱기사에 따르면, 전날 서해상에서 가진 함상 기자회견 때 박정희는 "독도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할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영토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협상할 수 있단 말인가? 터무니없는 말들이다"라며 정치적 밀약을 부인했다.

지금의 박진 장관처럼 한·일 협상을 총지휘한 이동원 당시 외무부 장관도 같은 날 동일한 발언을 했다. 13일 오후 국회 외무위원회에 출석한 그는 "독도의 영유권을 포기하려는 것이 아니냐?"라는 질문에 대해 "양보할 생각이 없으며, 박 대통령도 같은 뜻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라고 밀약을 강력히 부인했다.
  

독도 ⓒ 조정훈

 
독도 밀약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는 2006년 6월 노 다니엘 전 홍콩과기대 교수 겸 언론인과의 인터뷰에서 1965년 1월 11일 독도 밀약이 체결된 사실을 공개했다. 독도를 자국 땅으로 주장하는 것을 쌍방이 용인한다는 밀약이었다.

밀약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경우에 한국 정부는 이를 용인해야 했다. 그럴 경우에 한국 정부가 너무 심하게 대응하지 않기로 하는 약속이었던 것이다. 나카소네 전 총리의 말이 맞다면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을 용인해주기로 하는 밀약이었으니, 독도에 관한 한국의 주권적 권리를 훼손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일 양국이 김·오히라 각서로 청구권 문제에 관한 밀약을 만들어둔 것처럼 독도에 관해서도 위와 같은 밀약을 체결했다는 것이 나카소네 전 총리의 증언이다. 이 밀약의 존재는 2007년 4월호 <월간 중앙> 보도와 노 다니엘 교수의 <독도 밀약>을 통해 자세히 알려졌다.

2010년에 <일본문화학보> 제47집에 수록된 최장근 대구대 교수의 논문 '현 일본 정부의 죽도문제 본질에 대한 오해 - 독도밀약설과 한일협정 비준 국회의 논점을 중심으로'는 1965년 전후의 일본 국회의사록을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시민단체의 노력에 의해 일본 정부가 비공개로 하고 있던 한일협정 관련 자료가 공개되었다"라며 "그 자료 안에는 독도 밀약과 관련되는 자료가 포함되어 있었고, 또한 독도 밀약에 관한 당시 협정 체결 관련자들의 증언을 통해 독도 밀약이 구체화되었다"라고 설명한다. 

한일협정이 체결된 날, '분쟁 해결에 관한 한·일 교환 공문'이라는 별도의 합의서가 체결됐다. "양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하여 해결하는 것으로 하고 이에 의하여 해결할 수가 없을 경우에는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절차에 따라 조정에 의하여 해결을 도모한다"라는 내용을 담은 합의서다. 

합의서에는 독도에 관한 언급이 없지만, 일본 정부는 이것이 독도에 관한 분쟁 해결 절차를 약속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위 논문은 "일본은 한일협정을 성사시키기 위해 한국에 대해 독도 밀약에 동의하도록 했고, 이를 토대로 교환 공문이 작성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독도에 관한 언급이 교환 공문에 없는데도 일본이 독도와 교환 공문을 연관시키는 것은 교환 공문이 독도 밀약에 기초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이렇듯 밀약이 1965년 1월에 체결됐다는 유력한 증언이 그 후에 나왔지만, 그해 4월 박정희와 이동원은 터무니없다며 밀약을 부인했다. 오히려 6월 22일 협정 체결 직후 박 정권은 한일기본조약과 부속협정 어디에도 독도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을 자신들의 치적으로 홍보했다.

일본은 독도에 관한 규정을 협정안에 넣으려 했지만 자신들이 이를 막았다는 것이 박 정권의 주장이었다. 기자 12명의 토론회를 보도한 그달 28일 자 <동아일보> 3면에 따르면, 이 토론회에서 이런 보고가 나왔다.
 
(정부는) 제일 큰 성과를 독도 문제로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일본 측은 기어코 이 독도 문제를 협정 내용에 포함시키려 했던 것을 (자신들이) 봉쇄했다는 거죠.
 
이동원 장관은 한일협정 2일 뒤인 그달 24일 기자회견장에서 "한일협정은 역사적 비판을 받아도 부끄러움이 없는 내용으로 체결되었다"고 자평한 뒤, 독도에 관한 내용을 언급했다.

그는 "정부의 입장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는 것이며, 외상 회담에서도 이 문제를 들고 나올 경우 한일회담을 보이코트할 강경한 뜻을 밝힌 바 있다"라고 발언했다. 일본이 독도를 거론하면 회담을 보이콧하겠다는 심정으로 협상에 임한 결과로 성과를 내게 됐다고 자평했던 것이다.
 

1박2일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16일 오후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한일 확대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일본, 독도 거론했을 가능성 커

1965년 사례에서도 나타나듯이, 한일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자리에서 일본이 독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일본 언론과 정부 당국자는 16일 정상회담 때 독도 이야기가 나왔다고 확인해주었다. 독도 이야기를 거론하지 않았다는 윤석열 정부의 해명은 불충분하다.

낮은 지지율 때문에 한국에 대한 우호적 태도를 삼가던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그날 저녁 러브샷을 하면서 "한·일 우호의 맛이 진짜 맛있다"며 환하게 웃은 장면은 한국 국민들을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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