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간 숨어 있던 인정욕구가 다시 꿈틀거립니다

'서대문 FM라디오 만들기' 첫날 수업... 나를 찾아가는 과정

등록 2023.03.20 14:23수정 2023.03.20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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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하게 깔리는 음악에 중저음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별이 빛나는 밤에~" 하면 하루가 끝나고 나만의 밤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듯 나즈막하게 속삭여주는 DJ의 목소리는 입시를 준비하느라 힘들고 불안했던 고교 시절에 가장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책상 위에 잔뜩 펼쳐놓은 문제집은 뒷전이고, 머리 속으로는 방음벽으로 둘러싸인 녹음실에서 헤드셋을 쓰고 마이크 앞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극현실주의에 결정장애까지 있는 내가 보자마자 고민없이 '서대문 FM라디오 만들기' 수업을 신청한 건 아마도 그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첫 수업이 있던 날, 센터까지의 교통편과 소요시간을 몇 번씩 검색하고 여유있게 출발했는데 센터의 입구를 못 찾고 헤매느라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낯선 동네, 낯선 건물, 낯선 방송실에 낯선 사람들까지, 역시나 이번에도 낯가림은 만만치않은 첫 번째 난관이었다. 우리집 작은 방 만한 크기의 좁은 방송실에 수강생은 고작 6명, 그것도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으니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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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FM 라디오 만들기' 수업장소인 서대문 50플러스 센터 별밤방송실 ⓒ 심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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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장비와 원형 테이블이 있는 방송실 ⓒ 심정화

 
집 밖을 나서며 이제까지와는 다른 나를 만들어보리라 결심했기에 용기를 내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서 어색하기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나보다. 다행히도 모두 반갑게 내 인사를 받아주었고, 먼저 인사를 건넨 것만으로도 첫날의 미션을 완수한 것 같아 긴장이 좀 풀어졌다.

서대문 공동체 라디오 PD 강사님이 진행하시는 '서대문 FM라디오 만들기' 수업은 알고보니 진짜로 라디오 방송을 만드는 수업이었다. '공동체 라디오'란 특정 소규모 지역을 권역으로 하여 FM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을 송출하는 방송이다. 예를들어 재난 발생시 지역주민에게 대피행동요령을 신속하게 전달한다든지, 지역구 의원들의 구체적인 지역정책을 알린다든지, 그 지역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소식이나 정보들을 소개한다든지 하는 지역 밀착형 방송을 말한다.

공동체 라디오는 지역 주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방송으로, 이 강좌는 방송기획부터 녹음과 편집까지 라디오 방송이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을 교육하여 4월에 개국하는 서대문 공동체 라디오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그저 재미있을 것 같아 신청했는데 단순히 체험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방송에 참여한다니 강사님의 설명을 들을수록 마음이 무거웠다.

수업시간에 간단한 자기소개를 나눴던 뒤라서 말문이 트여, 쉬는 시간에는 수강생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나를 제외한 다른 분들은 모두 직장 경력도 화려하고, 이미 방송 경력이 있는 분도 계셨다. 7년 직장생활에 25년 전업 주부, 간간히 해 온 파트타임 일이 경력의 전부인 내가 낄 곳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였나보다.


"작년에 제가 책을 냈거든요."

왜 불쑥 그 말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모두들 자신의 경력을 이야기하는데 나도 뭔가 나 자신을 어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쩌다 지인들과 함께 책 한 권을 내고 부끄러워 주변에 제대로 알리지도 않았는데... 아무도 묻지도 않았고 궁금해 하지도 않는 것을 내입으로 먼저 꺼낸 것이다.

순식간에 시선은 나에게로 집중되었고, 아차 싶었지만 한번 뱉어버린 말은 주워담기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람들의 감탄과 칭찬의 말들...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오르고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에는 우쭐한(?) 아니 통쾌한(?) 뭐라 설명하기 힘들지만 분명 나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25년간 전업주부로 살아오면서 내 안에 이런 주목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아직 남아있을 줄은 몰랐다. 학창 시절 공부도 제법 잘했고, 직장에서 일 잘한다는 소리도 꽤 들었던 나는 어디에서나 존재감이 작지 않았지만, 주부로 지내면서부터는 나를 드러낼 일이 거의 없이 살았다. 전업맘으로 살면서 내 안에 자격지심은 점점 커지고 자신감은 점점 줄어들어갔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공공연한 작!가!가 되어버렸다. 앞으로 프로그램 기획안도 작성해야 하고, 방송 오프닝 멘트도 써야 하는데 작가 커밍아웃을 해버렸으니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할지 걱정스럽다.

수강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두 번째 수업에 갔더니 첫 시간 수업을 듣고 한 분이 수강을 포기하셨단다. 이제 남은 인원은 5명, 우리 수업을 관리하시는 담당자께서 우리를 '귀하신 분들'이라고 했다. 우물쭈물 하다가 그만 포기할 기회도 놓쳐버렸다.

내 머리 속에는 온통 방송에 대한 생각뿐이다. 무슨 주제로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어야할지 무척 고민스럽다. 신박한 기획안으로 제대로 인정받고 싶다. 주부생활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창의력과 기획능력을 내 속 깊숙한 곳에서 끄집어내야 할 때이다. 제발 내 안 어딘가에 아직 살아있기를... 그나저나 나 지금 안식하고 있는 거 맞나?
#주부안식년 #서대문50플러스센터 #공동체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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