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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아, 엄마는 사실 '겁쟁이 사자'야

아이들과 함께 그림책을 읽으며 생각한 것들

등록 2023.03.20 16:16수정 2023.03.20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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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오즈의 마법사>를 읽는다.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읽을 때마다 새롭다. 어릴 때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읽었을까 궁금하다. "오즈를 찾아가자, 도로시 어쩌고" 하는 노래를 부르며 고무줄 놀이를 방방 뛰었던 기억도 있으니 나의 어린 시절에도 '오즈의 마법사'는 확실히 있었다. 책은 기억 안 나지만. 
 
아이에게 물었다. 도로시와 친구들 중에 누가 가장 좋으냐고, 아이는 양철 나무꾼이라 답한다. 무엇이든 뚝딱뚝딱 만들어 내는 모습이 멋지다고. 양철나무꾼이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심장. 위험에 처한 친구들을 위해 필요한 걸 제때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양철 나무꾼은 어찌 보면 친구들을 위하는 마음, 심장을 이미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로시와 친구들은 모두 각자 간절히 원하는 한가지를 얻기 위해 오즈의 마법사를 찾아가지만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들은 이미 모두 자기 안에 깊숙히 가지고 있었다. 허수아비도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아이디어를 내었고, 양철 나무꾼은 친구들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만들었으며 겁쟁이 사자도 눈을 질끈 감고 "어흥!" 하고 외친다.

참고로 엄마는 뭐가 갖고 싶냐는 아이의 물음에 나는 튼튼한 다리라고 대답했다. 두 아들 쫓아다니느라 다리가 너무 아파서. 그런데, 내 다리는 이미 아가씨 시절보다 훨씬 튼튼하다. 두 녀석을 떠 받칠 수도 있고, 초인적인 힘으로 내달려 아이를 위험에서 잡아 내기도 하니 말이다.
 
어른이 되어 읽으니 다른 누구보다 겁쟁이 사자에게 마음이 간다. 사자인데 겁이 많다니, 귀엽고도 인간적이다. 아니 사자적이라고 해야 하나. 겁도 많고, 걱정도 많고, 게으르고, 슬기로운 생활, 건강한 생활, 부지런한 생활과는 거리가 먼 나이지만, 엄마라서 꽤나 그런 척, 그렇게 살아야 하는 내 모습이 보여서 인지도 모르겠다.

겁쟁이 사자가 무서움을 참고 '어흥' 하듯이, 나도 두려움을 견디며 아이들 앞에서 짐짓 괜찮은 척 한다. 사실은 무섭지만, 나의 무서움은 몇 배로 증폭되어 아이들에게 전달될 것이기에 의연한 척 한 적도 많다. 코로나 걸렸을 때, 집 이사 문제가 꼬이고 꼬여 골치가 지끈 거릴 때, 친정 아빠가 하늘로 가실 준비를 할 때.

아무튼 엄마가 되고 난 후 겁쟁이 사자는 그냥 겁쟁이 사자로 보이지가 않았다. 때로는 나로, 우리 신랑으로, 우리 엄마로, 우리 아빠로 보여 가장 애착이 가는 캐릭터가 되었다. 겁쟁이 사자가 두려움을 꾹 참고 어흥! 하며 진짜 사자가 되어 가듯, 나도 무섭지만, 긴장되지만, 귀찮지만 의연하게 꼿꼿하며 그렇게 엄마가 되어 살고 있다.

때로는 돌아서서 다리가 풀리기도, 눈물이 터질 때도 있지만 아이들 앞에서는 사자이고 싶다. 엄마가 사실은 겁쟁이라는 걸, 아이들이 알게 되어 나를 더 이해해 주고 사랑해 준다면 참 좋겠지만 아니어도 상관없다. 엄마로서 의기양양한 사자인 모습으로 아이들의 마음에 남는 것도 꽤 괜찮은 인생인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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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가 나오는 책 두권 같은 사자이지만, 둘 다 겁쟁이 사자 이지만, 너무 다른 사자입니다. 사람들도 이 사자들처럼 각기 다 다른 성격, 개성을 가지고 살아가겠지요. ⓒ 한제원

 
또 다른 겁쟁이 사자 램버트가 있다. 황새가 엄마 양에게 배달해 준 아기 사자, 배달 사고임을 인지한 황새는 아기 사자를 도로 회수하겠다 하지만, 순한 양 엄마는 그런 황새를 들이받으며 아기 사자를 자기 새끼로 지켜낸다.

아무리 순한 양이어도, 자기 새끼 앞에서만은 맹수미를 뽐내는 것이 엄마이다. 아기 사자는 양들 가운데서 자라며 양처럼 굴지만 도무지 양이 될 수 없어 슬프다. 다른 양들은 감히 사자를 비웃고 놀린다. 자기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사자는 제가 사자인 줄도 모르고, 아니 사자가 무엇인 줄도 모르고 양들에게 놀림당하며 겁쟁이로 자란다. 가스라이팅과 따돌림, 인종차별의 전형이라고 보인다. 결말에는 양들을 해치러 나타난 늑대를 향해 겁쟁이 사자가 용기를 내어 '여흥'을 해서 영웅으로, 사랑받는 사자로 거듭난다는 해피 엔딩의 그림책이지만, 마음 한 구석 조금 무거운 마음은 있었다.

램버트를 놀리는 다른 양들을 혼내는 어른은 왜 없지, 자기와 다르다고 그렇게 놀리면 안 되는 건데. 온몸을 던져 램버트를 자기 새끼로 받아들인 훌륭한 엄마 양도 기질과 성격을 파악해야 하는 육아에선, 형편없긴 마찬가지였다. 사자에게 너는 훌륭한 양이 될 거라고, 다른 양들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한다. 세상에나, 나를 뒤돌아보게 하는 장면이었다.

딸 셋 중에 막내딸로 큰 내가 아들 둘을 키우는 것이, 바로 이 엄마 양이 아들 사자를 키우는 마음과 비슷할 것이다. 우리 집엔 다 순한 딸들밖에 없었는데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지, 하는 낯선 마음이 솔직히 든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시키는 대로, 내가 커 왔던 대로, 순하게, 얌전히 자라라 할 수도 없다. 엄마 양은 램버트를 그렇게 키워서 애가 겁쟁이가 되었으니 이를 반면교사 삼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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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아들. ⓒ 한제원

 
생태 유치원에서 하루 종일 밖에서 놀다 오던 아이는 학교에 입학하더니 체력이 남아도는 모양이다. 집 앞 공원에서 화단에서 나무와 풀과 흙을 가지고 한참을 놀아야 직성이 풀린다.

거기 개들이 다니면서 쉬 하는 데라고, 손톱에 때 낀다고, 그 손으로 지금 과자 먹겠다는 거니, 춥다 들어가자, 엄마 간다,를 연발하며 '얘는 왜 저럴까'를 한참 생각했는데 우리 아들도 순한 양에게서 크고 있는 사자 램버트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위로를 받는다. 사자는 사자처럼 키워야 하듯, 아들도 아들처럼 키워야 하니까.

두려움을 꾹 참고 애써 의연함을 보이는 내가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겁쟁이 사자처럼, 망아지처럼 날뛰는 아들들은 겁쟁이사자 램버트로 보인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다 사자이다. 너도 사자, 나도 사자, 우리는 그냥 다 사자 하자. 잘 크자, 잘 살자, 잘 늙자. 너희 사춘기에, 나의 갱년기에 피 터지게 싸우지만 말자꾸나. 사자들끼리. 
덧붙이는 글 브런치에 실릴 예정입니다.
#오즈의 마법사 #겁쟁이사자 #기질 #엄마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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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둘을 키우고 있습니다. 아이 교육과 독서, 집밥, 육아에 관한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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