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하지만, 불운한 채무자는 어떻게 가려내나요?

도덕과 법률, 채권자와 채무자의 딜레마... 회생·파산제도에서 불꽃을 피우다

등록 2023.03.22 16:17수정 2023.03.22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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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채권채무 계약이건, 금융기관을 통한 대출계약이건 채권자는 100% 변제를 기대한다. 이것은 신용사회의 약속이다. 그럼에도 자본주의적 삶은 어느 개인에게 이 약속을 지킬 수 없게 하는 곤란한 상황을 부여한다. 경제적 파산에 직면한 개인은 그 원인을 불문하고 회생법원의 문을 두드린다. 이 과정에서 그 행위의 정당성에 관한 도덕적 기준과 법률적 판단이 가진 딜레마가 불꽃을 피운다.

회생법원의 회생·파산절차를 통해 구제가 이루어지면, 채권자들의 항의는 도덕적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법률적으로는 일정한 제한을 받게 된다. 채권자는 회생절차의 경우에는 변제계획에 따라 채권금액의 일부만 변제받고, 파산의 경우에는 전액 탕감에 따라 모두를 받지 못한다.

채권자와 채무자의 딜레마, 누가 내 억울함을 들어줄까요?

"왜, 내 돈을 못 받는건데... 당신들이 뭔데, 그 돈 빌리고 안 갚는 사람들을 대변하는데..."
"1억을 빌려놓고 3천만 원만 갚는다는데... 도대체 이런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돈 빌려준 채권자도 서민들도 많은데, 일방적으로 양보해야 한다니. 천불 나는 억울한 사정은 누가 들어주나..."


난데없는 고함소리가 오후의 고요를 갈랐다. 채권자의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가 사무실을 뒤흔들었다. 한두 번 들리는 고성이 아니어서 적응될 법도 하지만, 폭탄처럼 터지는 억울함을 듣다 보면 마음 한구석에 바위가 놓인 듯 무거워진다. 그렇다고 현행법과 제도가 가진 취지로 저 억울한 심정을 위로하거나 해소할 길도 없다. 채권자의 입장에서는 국가가 법과 제도로 일방적으로 채무탕감을 해주는 제도가 불합리할 수밖에 없다.

개인이 억울한 채권자인 경우에는 그 비율지 높지 않지만, 그 목소리는 무시할 수 없다. 회생파산절차에서 채권자의 대부분은 금융기관이다. 금융기관의 경우 대출과정에서 채무자의 자산상황이나 담보 등 신용에 대한 조사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일정 부분 리스크를 부담해야 한다. 그렇다고 채무자의 경제상황과 파산신청 행위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다른 차원의 판단이 필요한 이유다.

도덕적 판단과 법률적 판단의 딜레마, 왜 투기한 사람까지 파산신청을 받아주나요?


"왜 빚투와 영끌해서 한탕을 노린 이들을 국가가 구제해줘야 하나요?"
"왜 투기한 사람들의 채무를 국가에서 탕감해주나... 전 국민을 투기꾼으로 만들 생각이냐!"
"어떻게 아껴서 저축하고 착하게 산 사람보다, 빚내서 일확천금을 노린 사람들이 더 이익을 보나." (댓글의 대부분은 "왜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자신의 이익과 욕망을 위해 한 결과를 국가가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구제를 해주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서울회생법원에서 가상화폐 관련 실무준칙(주식 또는 가상화폐 투자 손실금의 처리에 관한 실무준칙)을 발표했을 때 일반 국민들의 반응이었다. 영끌과 빚투는 최근 몇 년간 줄임말의 대표주자로 등장한 단어다. '영끌'은 영혼까지 끌어모았다는 뜻이고, '빚투'는 빚내서 투자한다는 의미다. 의도만큼 좋은 결과로 이어지면 좋겠지만, 행운의 여신과 자본주의적 불확실성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달콤한 부자의 꿈을 꾸다가도 누군가는 경제적 파산의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다.

2020년 전후의 대한민국은 투자(혹은 투기) 광풍에 휩쓸렸다. 너나 할 것 없이 재테크의 마법에 시간과 돈을 쏟아 부었고, 어떤 사람은 영혼까지 갈아 넣고 있었다. 가상화폐, 부동산, 주식 등 각종 자산증식의 열풍으로 인해 수많은 이들의 희비가 엇갈렸다. 누군가는 자산을 뻥튀기하고 다른 누군가는 자산을 탕진했다. 행운과 불행의 여신이 시간의 신인 크로노스의 손을 잡은 까닭이다. 이로 인해 경제적 부를 축적한 소수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만, 빚만 늘어난 이들은 절망과 좌절의 친구가 된다.

결국 경제적 상황이 어려워진 이들은 회생파산제도의 손길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여기서 부동산, 가상화폐, 주식을 포함한 빚투나 영끌의 결과가 경제적 파산으로 이어졌을 때... 과연 그 개인이 파산신청이나 회생신청을 할 수 있는 정당한 자격이 있는가가 문제된다. 다시 말해 법이 구제해줄 수 있을만한 '성실한 채무자의 조건'에 부합하는가가 문제된다.

성실한 채무자는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도덕적 정의에 기초한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은 명확하다. 따라서 약속이나 계약을 통해 빌린 돈(빚)은 갚아야 한다는 법언을 따른다. 도덕적 판단기준은 일반국민의 법 감정과 유사한 주파수를 가진다. 따라서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는 명제를 뒤집어 보면 법은 도덕적 기준을 응축시켜 제도화한 것에 불과하다. 채무자의 개인이나 가정 사정이 어떻든 간에 모두 개인의 책임이 된다. 불가피한 상황에 대한 고려는 차후의 문제다.

반면, 법률적 정의는 사회정책의 옷을 입고 다소 온정적이다. 법률이 제정된 특별한 목적을 위해 도덕적 기준의 엄격함을 유보시킨다. 따라서 채무를 일정 부분 탕감해주거나 면책시켜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자는 쪽이다. 채무자의 경제적 회복이 사회경제적으로 유리하다는 정책적 판단이 법률에 반영된 까닭이다. 역사적으로도 파산제도는 개인의 경제적 실패를 국가가 떠안는 사회적 안전망의 역할도 하고 있다. 다만, 그 재생의 희망은 '정직하고 운 없는 채무자'를 전제로 한다.

개인 채무의 성격을 살펴보면, 악의의 투기나 낭비 혹은 게으름 때문에 진 빚과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았음에도 어쩔 수 없이 진 빚이 있다. 신청인의 빚의 성격을 판단해야 하는 채무자회생법은 채권자와 채무자, 도덕과 법률의 딜레마 모두를 안고 있다. 양자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그 개인이나 사회에 유리한가?'에 대한 결정이다. 그러면서도 흔히 우려하는 도덕적 해이를 방치해서도 안 된다. 또한, 파산제도의 선한 손길을 악용하는 이용자의 불순한 의도도 막아야 한다.

채무자 구제의 법적 연원은 미국의 연방도산법(연방파산법)에서 기인한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유사한 제도를 두고 있는 세계 여러 나라의 채무자회생법의 뿌리가 그 법에서 비롯된다. 연방도산법은 채권자에 대한 공정한 변제와 '정직하지만 불운한 채무자'에 대해 채무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설계를 가능하도록 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쉬워 보이지만 '정직과 불운'은 모두 불확정적 추상적 개념이면서도 그 기준을 누가 정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결국은 도산(파산)제도를 가진 각국의 법률과 사회적 상황에 맞춰 구제받을 수 있는 채무자를 선별할 수밖에 없다. 그 선별기준 또한 시대적 상황이나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한다.

정직하지 않은 채무자를 어떻게 걸러낼 것인가?

우리의 입법자들과 실무자들 또한 채무자의 '정직과 불운'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법률적 사고를 전제로 하는 결정 앞에는 국민의 법 감정과 도덕적 기준이라는 험난한 판단기준이 늘 기다리고 있다. 일반 국민의 법 감정이 부동산이나 코인 등의 위험자산에 투자한 채무자를 정직하지만 불운한 채무자로 볼 것인가 여부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회생법원은 신청된 회생파산사건 처리과정에서 선의의 채권자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각 업무당사자들이 심사를 하고 있다. 채권자들의 정당한 권리보호는 성실하지만 불운한 채무자 선별과정과 맥락이 닿아있다. 개인회생절차에서는 회생위원과 관리위원회 및 판사가, 파산절차에서는 관리위원회와 파산관재인, 채권자집회 및 판사가 서로 유기적 협조 하에 신청인인 채무자가 '정직하지만 불운한 채무자'인지 여부를 가려내고 있다.

개인회생 사건에서는 회생위원이 채무자를 면담하고 그가 제출한 신청서와 각종 첨부서면을 심사한다. 법원은 변제계획 인가 이전에 채무자가 신청자격이 없거나 허위로 서류를 작성하는 등 채무자회생법상 요건에 부합하지 못할 때에는 회생절차를 폐지할 수 있다. 또한 파산절차에서는 판사의 서면심사와 채무자 심문을 통해 신청인 적격을 심사하고, 법정 요건을 결할 시에는 신청을 각하하거나 기각할 수 있다. 따라서 사해행위를 통한 파산, 형사적 절차를 피하기 위한 회생신청은 절차심사 단계에서 일정 부분 걸러진다.

회생·파산절차에서 억울한 피해를 입은 채권자들을 설득하는 것도 제도를 운용하는 실무자들의 업무다. 고성과 탄식이 오가는 가운데에서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제도적 취지를 공감시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채권자들에게 좀 더 덜 피해가 가는 절차를 알려주는 것도 부수적 업무에 속한다. 사해행위나 고의파산으로 파산절차를 악용하는 채무자를 비난하는 채권자들에게는 더 이상 해줄 말은 없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의 법정(法廷)에서 베니스 상인에 등장하는 어느 재판관의 판결 같은 동화(童話)를 기대할 수는 없다. 감동과 반전이 담긴 이야기는 가공의 스토리일 뿐이고, 감정 없는 현실의 법정은 냉정한 판결로 남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회경제적 삶은 이상향과 동경의 평면보다는 늘 판단과 유보라는 딜레마에 쌓여있다. 그것만이 진실이다.
덧붙이는 글 필자는 회생법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 중복 발행할 예정입니다.
#개인회생 파산제도 #도덕적 해이 #딜레마 #채무자회생법 #연방도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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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교육원 교수를 거쳐 현장에서 밥벌이 중입니다. 부모와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을 꿈꾸고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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