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23 11:48최종 업데이트 23.03.23 11:48
  • 본문듣기
 

봄까치꽃. 정식 명칭은 일본어 이름을 그대로 번역해 옮긴 큰개불알꽃이다. ⓒ 성낙선


봄이 매우 빠른 속도로 북상하고 있다. 하루가 다르다. 서울에서도 봄꽃들이 서로 경쟁을 하듯이 앞을 다투어 피고 있다. 며칠 전만 해도, 산수유 나뭇가지에 듬성듬성 매달려 있던 꽃들이 그새 만개를 해서 아파트 화단이 화사한 봄빛으로 물들어 있다.

남도에서는 지난 19일 광양 매화축제, 구례 산수유축제 같은 주요 봄꽃축제들이 막을 내렸다는 소식이다. 서울은 이제 시작이다. 그리고 축제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봄이 북상하는 속도로 봐서, 서울에서도 바로 축제를 준비해야 할 것 같다. 한강에서는 벌써 개나리꽃이 만발했다.


성수대교에서 뚝섬으로 가는 길가, 자전거도로 주변이 온통 노랗게 물들어 있다. 꽃사태가 이런 것인가 싶을 정도다. 봄이면, 산 전체가 개나리꽃으로 뒤덮이는 응봉산도 예외가 아니다. 개나리꽃이 일찍 개화하면서 응봉산에서 열리는 개나리 축제도 시기를 일주일가량 앞당겨 개최한다는 소식이다. 올해 개나리 축제는 25일까지 열린다.

한강은 서울에서도 봄소식을 가장 빨리 알 수 있는 곳이다. 산수유, 개나리뿐만이 아니다. 한강공원 어디에서나 꽃이 피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눈에 잘 띄지 않아서 그렇지, 어쩌면 한강에서 봄에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것은 우리에게 이름도 생소한 들꽃들인지도 모른다.
 

응봉산을 뒤덮은 개나리. 그 밑으로 고속열차가 지나가고 있다. ⓒ 성낙선

 
처음엔 정말 정식 명칭일까 의심했다

자전거도로가 지나가는 길가 풀섶에도 들꽃이 잔뜩 피어 있다. 그 들꽃들 중에 유독 '봄까치꽃'이 눈길을 끈다. 봄까치꽃은 이른 봄에 흔히 보는 들꽃 중에 하나다. 어린아이 손톱 크기의 옅은 하늘색 꽃이 땅바닥에 쫙 깔리다시피 피어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꽃인 줄도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길가에 봄까치꽃이 잔뜩 피어 있는 걸 보게 되면 반갑다. 그 작은 꽃에서도 봄이 왔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봄까치꽃은 꽃송이가 작아서 더 예뻐 보인다. 자세히 보려면 어떻게든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는데, 그러다 보면 또 애틋한 마음마저 생긴다.

그런데 그렇게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다가도, 이 꽃의 정식 명칭만 떠올리면 금세 마음이 상한다. 아직도 이 들꽃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이 남아 있다. 이 꽃의 정식 명칭은 '큰개불알꽃'이다. 이름이 너무 저속해, 그때는 이게 정말 정식 명칭일까 의심했다. 아니길 바랐다.

큰개불알이라는 이름은 일제 강점기에 '마키노'라는 이름의 일본인 식물학자가 붙인 것이다. 큰개불알꽃의 열매가 '개의 음낭'을 닮았다 해서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학자가 지은 이름치고는 너무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일본인으로서는 나름 진지한 태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마키노는 '일본 식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
 

한강 자전거도로의 개나리. ⓒ 성낙선

 
'개', '좀', '쥐' 자가 들어간 우리 식물들

일본인들이 만들어 붙인 이름들 중에, 이런 종류의 이름이 한둘이 아니다. 우리나라 식물 중에는 유난히 '개', '좀', '쥐' 자가 들어가는 이름들이 많다. '개망초', '쥐오줌', '좀민들레' 등이 그런 이름들이다. 왜 그런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이런 이름들 상당수가 일본 이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니, 참 고약하기 짝이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윤옥씨가 펴낸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인물과사상사, 2015)을 보면, '큰개불알꽃'을 비롯해 '며느리밑씻개', '도둑놈의갈고리', '좀개갓냉이' 등도 일본 이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며느리밑씻개의 일본말은 '의붓자식의밑씻개'이다. 일본말을 흉내 내면서 우리가 오히려 한 발 더 나간 꼴이다.

심지어 개나리는 일본어 표기에 '개' 자가 들어가 있지 않은데도 일제강점기에 일본식 교육을 받은 우리 학자들이 기계적으로 '개' 자를 넣어 이름을 지은 경우다. 봄철에 개나리만큼 아름다운 꽃도 드문데 거기에 왜 '개' 자를 가져다 붙였는지 의문이다. 이런 이름을 가진 식물들을 대할 때마다 은연중 하찮고 질이 낮다는 인상을 받는다.

'큰개불알꽃'이라고 불렀을 때와 '봄까치꽃'이라고 불렀을 때의 느낌이 판이하다. 느낌이 다르면, 그 이름을 가진 사물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일본인 학자들은 그렇다 치고, 해방 후에도 이런 일본어 이름들이 살아남아, 우리나라 식물학자들이 펴낸 식물도감에까지 그대로 올라가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봄까치꽃, 이른 봄 길가 풀섶에서 흔히 보는 꽃이다. ⓒ 성낙선

 
'개불알'과 '복주머니'... 같은 꽃 다른 이름

그동안 우리가 길가에서 흔히 보는 우리 들꽃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무시해온 태도가 어쩌면 그 이름들에서 비롯됐을 수도 있다. 그 이름들 상당수는 일본인들이 우리 민족의 정서를 무시한 채 자기들 멋대로 지은 이름들이다. 더러는 우리 학자들이 무감각하게 일본식으로 지은 이름들도 있다.

해방이 된 지 수십 년이다. 그 사이 누군가 그 이름들을 바꿔 보려는 시도를 했을 법하다. 큰개불알꽃과는 종류가 다르지만, 이름은 거의 똑같은 '개불알꽃'이라는 이름이 있다. 개불알꽃은 그나마 꽃 모양을 보고 지은 이름이다. 이 개불알꽃이 요즘은 '복주머니란'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복주머니란은 1970년대 국내의 한 식물학자가 '개불알이라는 이름이 너무 저속하다'는 이유로 개명을 요청하면서 어렵게 이름을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같은 개불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큰개불알꽃은 개명을 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나머지 식물들은 말할 것도 없다. 복주머니란은 개명을 한 극히 드문 사례에 속한다.

이 사례에서 눈여겨봐야 할 건, 같은 꽃 모양을 보고서도 누구는 개불알을 떠올리고 누구는 복주머니를 떠올렸다는 사실이다. 애정을 가지고 보면 이름이 달라진다. 개명이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많은 학자들 중에 그 누구도 이 사태를 근본적으로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정식 명칭을 고수하는 게 학자들이 지녀야 할 태도라고 하더라도, '개불알'이나 '밑씻개' 같은 일본식 이름까지 지켜내려는 태도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국제적인 규약을 지켜야 하는 '학명'은 손을 댈 수 없다고 해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부르는 이름은 충분히 고칠 수 있었던 게 아닌지 묻고 싶다.
 

뚝섬 한강공원,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 ⓒ 성낙선

  
우리 식물에 자기 이름을 새긴 일본인들

사실, 학명을 들여다보면 더 기가 막힌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고유 식물 527종 중 학명에 일본 식물학자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식물이 무려 327종이나 된다고 한다. 마키노, 나카이, 유에키 같은 이름들이다. '금강초롱' 같은 경우에는 조선 초대공사였던 '하나부사'와 일본인 식물학자인 '나카이'라는 이름이 함께 들어가 있다. 나카이가 하나부사에게 '금강초롱'을 헌상한 것이다.

이상화 시인이 쓴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지금은 남의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시작해서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로 끝맺는다. '봄조차 빼앗기겠네'라는 문구가 가슴을 친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겨우 들판은 되찾았지만, '빼앗긴 봄'까지 되찾는 데는 너무 무신경했다는 생각이다.

'일본 식물학의 아버지'이자 큰개불알꽃의 작명자인 마키노는 그의 저서 <식물일일일제>에 "그동안 일본의 풀과 나무 이름은 한자로 써왔는데 이것은 낡은 생각이다... (중략)... 자기 나라의 훌륭한 식물 이름이 있는데 남의 나라 문자로 그것을 부른다는 것은 자신을 비하하는 독립심이 결여된 생각이다"라고 썼다(<창씨개명된 우리 풀꽃>, 165쪽).

그리고 바로 이어서 마키노는 "이러한 자세는 자기 양심을 모독하고 자기 자신을 욕보이게 하는 것이므로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다"며 후대 식물학자들을 강하게 질책했다. 남의 나라에 와서는 말과 글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창씨개명까지 강요한 나라의 식물학자가 하는 말치고는 참으로 뻔뻔하다. 얼핏 들으면, 우리나라 학자가 했을 법한 말이다.
 

뚝섬 한강공원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휴식을 즐기는 사람들. ⓒ 성낙선

 
'봄까치꽃'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마키노의 이 같은 주장을 우리 학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우리나라 땅에서 자라는 식물들에게 우리 정서에 맞는 이름을 되찾아주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이름을 빼앗겼다는 건 곧 혼을 빼앗긴 것과 마찬가지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우리 주변을 보면 혼을 빼앗긴 거나 다름이 없는 일들이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길을 가다 '이 꽃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해야 하나? 어물쩍 넘어가면 그나마 다행이다. 멋모르고 스마트폰으로 꽃 이름을 검색하다가, '큰개불알꽃'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오는 걸 보게 되면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소스라치게 놀랄지도 모른다.

그나마 '봄까치꽃'이라는 이름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봄까치꽃은 한때 국내 야생화 동호회를 중심으로 우리 들꽃에 순수한 우리말 이름을 지어주자는 운동이 일어나면서 생긴 이름이다. 봄까치꽃에는 '봄소식을 알려주는 전령사'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한강에서 우연히 이 꽃을 보게 되면, 그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인사를 나눠 보는 것은 어떨까?

주말이 되면, 한강이 주말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요즘 미세먼지가 자욱한 탓에 사람들이 외출을 자제해서 그렇지, 공기마저 좋아지면 한강공원이 더욱 혼잡할 수도 있다. 이럴 때 사고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한강에서 자전거와 보행자가 부딪히는 사고가 늘고 있다. 주의를 당부한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