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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층의 '이방지대'로 시작된 골프장, 서울CC

군자리골프장 부지를 이승만 정부가 '민영화'하다

등록 2023.03.23 14:25수정 2023.03.23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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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들의 골프연습 전경(1953년 9월 25일,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 연덕춘 프로의 증언에 따르면, 군자리골프장을 건설하면서 먼저 골프장 한구석에 연습장부터 만들었다고 한다. ⓒ 강인구

 
1955년 11월 26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보면, "놀고먹는 20만 평, 대호화판의 컨추리클럽 꼴프장, 금력과 권력의 특수지"라는 제목으로 당시 '코리아의 이방지대'를 비판하고 있다. 한마디로 "자동차가 없으면 도저히 올 수 없는 곳! 10만 환이 없으면 입회할 수 없는 클럽! 설사 그것들이 있다고 해도 고관대작, 실업가, 정치가 등등 그러한 지대의 사람이 아니며는 끼어들기 힘든 곳!"이었다. 특권층의 이방지대였다. 이곳이 바로 지금에 서울어린이대공원 자리에 위치했던 군자리골프장이다.

6.25전쟁은 남북 분단국가를 고착시켰다. 이승만 정부는 정치·군사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더욱더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골프장 건설을 지시한 까닭 역시 주한미군용이었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대한골프협회에서 편찬한 <한국골프 100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에 골프장이 없어 휴일이면 부득이 미군 장성들이 일본 오키나와로 가서 골프를 한다는 얘기를 듣고서 골프장 건설을 지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올해는 6.25정전 70주년 되는 해이다. 6.25전쟁이 채 휴전되지 않은 1953년 초 앞서 서울CC '창설동의자' 모임이 만들어졌다. <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에 보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측근인 이순용을 비롯한 강성태(재무부 차관), 김동준(합동통신사장), 김유택(한국은행 총재), 김진형(한국은행 부총재), 김태선(내무부 장관), 백두진(국무총리), 손원일(해군총참모장), 윤호병(상업은행장), 이기붕(전 국방부 장관), 임문환(전 농림부 장관), 임송본(국회의원), 장기영(조선일보 사장), 전용순(서울상공회의소 회장), 조정환(외무부 차관), 조주영(국회의원), 최순주(전 재무부 장관), 한홍(외자관리청 차장) 등 18인이 서울CC '창설동의자'에 참여했다. 서울CC 창립 준비 모임은 처음부터 당대 주요 정관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직후 8월 15일에야 이승만 정부는 부산에서 서울로 환도하였다. 전후 복구가 끝나지 않은 때이기는 했지만 군자리골프장을 건설하려는 움직임은 한층 바빠졌다. 급한 대로 1953년 11월 11일에 창설동의자를 주축으로 서울CC 창립 총회를 열었다. 당시 군자리골프장의 정식 명칭은 사단법인 서울칸트리구락부(영어:Seoul Country Club)이었다.
 
"11일 하오 4시 외자관리청장실에서는 국제친선과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목적으로 '골푸'장의 부활을 꾀하는 서울칸트리구락부의 발기인회가 사단법인 서울칸트리구락부의 창립총회를 겸하여 개최되었는데 동 구락부에서는 회원들이 경비를 부담하여 명춘(내년 봄;필자) 해빙기까지에 동양 제일의 군자리'골푸'장을 개설할 것을 목표로 즉시 제1기 공사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한다."(<조선일보> 1953년 11월 13일)
 
구황실 재산과 군자리골프장 부지
 
1973년 출간된 <한국골프총람>에서 찾아보면, 군자리골프장 건설은 구락부 창립과는 별도로 진행됐다. 창설동의자 가운데 이순용(총괄), 김진형(재정), 김동준(홍보), 연덕춘(설계 및 현장) 등이 주도적으로 골프장 코스를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고 한다. 후일 한국 골프계의 대부로 통하게 되는 이순용은 체신부장관, 내무부장관, 해운공사장을 거쳐 당시 외자관리청장(현 조달청)을 하고 있었다. 연덕춘은 일제강점기 전일본프로골프선수권대회에 최초로 출전해서 우승까지 한 프로골프계 원로격이다.

군자리골프장 부지는 일제강점기 때 골프장으로 이용되던 기존의 뚝섬 골프 코스 자리로 정해졌다. 당시 뚝섬 지역은 전쟁통에 미군이 주둔하던 곳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첫 번째 미션은 구황실 재산으로 묶여있는 골프장 부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군자리골프장 부지는 소유권이 국가에 있었고 일부 농지는 소작농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골프장 부지의 소유권이 구황실재산사무총국에 있었기 때문에 국유지를 불하받는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 수립 후 군자리골프장 부지를 포함한 구황실 재산 일체는 법적으로 국유 재산 목록에 등재하도록 조치되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의 궁내성에 소속된 이왕직에서 관리하던 구황실 재산은 미군정 시기에 매도된 일부 재산을 제외하고 전부 국유화됐다. 하지만 구황실 재산은 미군정청에 의해 한국 정부로 이관해야 할 귀속재산 목록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구황실 재산을 특별회계로 운영하기 위해 구황실재산관리특별회계법(1953년 4월 18.일제정)을 시행했고, 기존 이왕직에서 관리하던 재산을 문화재로 보존하기 위해 구황실재산법안을 국회에서 심의하고 있었다. 국가법령정보센터에서 검색해보면, 이 법 제5조에 '구황실재산을 관리하기 위하여 대통령 감독하에 구황실재산관리위원회와 구황실재산사무총국을 둔다' 했고, 제9조에서는 '대통령은 위원회와 사무총국에 대하여 감독상 필요한 사항을 명령하며 그 결의 또는 처분이 위법 또는 부당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이를 취소할 수 있다'고 해서 대통령에게 거의 전권을 부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후복구 시기에 군자리골프장 부지를 요즘 식으로 말하면 민영화부터 했다. 처음에는 매각 아닌 임대 방식이었다. 지금 확인되는 골프장 부지 최초의 임차 조건에 대해서는 신용남의 회고록 <골프 교우 50년:한국골프 요람기의 서울CC>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서울CC 건설은 정부가 정면으로 나선 것은 아니지만 관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승만 박사는 이 왕가 소유의 땅을 '원 달러 콘트렉트' 방식(증여는 못하게 하는 조건으로 평당 1원씩 거래)으로 빌려 주고 관이 적극 지원하도록 한 것..."
 
하지만 군자리골프장 건설에 '정부가 정면으로 나선 것이 아니라'는 신용남의 주장이 무색하리만큼 서울칸트리구락부 창립과 군자리골프장 건설은 처음부터 이승만 정부의 '고관대작' 중심으로 이뤄졌다.

서울칸트리구락부 창립총회도 지금은 사라진 중앙청 별관에 위치했던 외자관리청장실에서 개최됐다. 창설동의자가운데 강성태, 김진형, 윤호병, 이순용, 임문환, 임송본, 장기영, 전용순, 조주영, 한홍 등 10인이 참석했다. 창립총회에서는 취지문과 정관을 심의해서 통과시켰고, 다음해 초까지 몇차례 이사회를 개최해 초대 임원진이 선출되었다. 그즈음 이병철 삼성물산 사장과 정주영 현대건설 사장도 서울CC 법인회원과 찬조회원으로 각각 가입했다.(<골프저널> 2021년 1월) 서울CC 초대 이사장에 이순용 외자관리청장, 부이사장에 임문환 한국무역협회장 등을 선출했다. 특권층의 전유물로 한국 골프는 시작된 것이다. 

결국, 6.25전쟁 정전협정이 맺어진 1년여 뒤, 당시엔 서울 외곽이었던 뚝섬에 전기는 경성전기, 수도는 서울시, 전화는 체신부, 식목은 내무부 그리고 기타 자재는 교통부와 주한미군으로부터 특별한 협조를 받아 1954년 7월 11일에 골프 코스를 개장할 수 있었다. 군자리골프장은 전장 6750야드, 파 72의 골프코스로 개장됐다.
 
 
#군자리골프장 #서울CC #특권층 #구황실재산 #민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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