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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글로리'가 던진 모성에 대한 이의, 가족의 가능성을 열다

[리뷰] 드라마 <더 글로리>

23.03.23 11:09최종업데이트23.03.23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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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예쁘다고 하지 않던가

끝 간 데 없이 악랄하고 못될 것 같던 연진이었다. 그리고 그 악마의 휴대폰 배경 화면은 말랑한 자식의 얼굴이 한가득 담긴 사진이었다. "우리 강아지" 연진은 딸을 그렇게 불렀다. 담배를 피우다가도 아이가 나타나면 황급하게 피우던 개비를 지져 끄는, 영락없는 엄마였다. 고데기로 동급생의 팔다리를 지져 대던 일은 없었다는 듯이.
 

<더 글로리> 3화 장면 ⓒ 넷플릭스

 
<더 글로리>는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에는 예외가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동은의 속을 폐허로 만든 연진조차 귀여운 예솔 앞에서는 하염없이 녹아내렸으니 말이다. 동은이 우연 한 줄 없이 담임교사로 처음 등장했을 때, 시종일관 뻔뻔하던 그는 불안에 떨었다. 행여 예솔이 해코지를 당할까 걱정돼서다. 학교에서 생기는 일은 모조리 말해야 한다고 어린애를 닦아세우고, 차라리 다른 나라로 멀리 유학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며 남편을 설득한다.

악인의 고슴도치 같은 모습은 이뿐만이 아니다. 사라의 목사 아버지는 신도 수백 명 앞에서 축도를 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마약을 하는 딸의 죄를 사하기에 급급하다. 그런가 하면 어머니는 약에 취해 난교하다 널브러진 아이를 깨워 해독제를 링거로 꼽아준다. 밥 먹듯이 걸걸한 욕지거리를 주워섬기던 재준은 예솔 앞에서 오래된 습관을 삼킨다.

영애는 부정을 탄다는 이유로 연진에게 같이 어울릴 친구의 이름마저 정해준다. 담임 선생님이 시계까지 벗으며 동은에게 손을 올린 건 교대에 간 자랑스러운 아들이 남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싫어서다. 아무리 나쁜 사람도 피를 내준 자식 앞에서는 그들만의 방법으로 모성과 부성을 내보이기 마련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다.

피는 물보다 진해. 그래서 희석하기도 버겁겠지만

한편 지리멸렬한 모성과 부성도 보인다. 흉악하긴 하더라도 기실 누군가에게 익숙할 장면이기는 하다. "핏줄이 그렇게 쉽게 끊어지니?" 동은 어머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동사무소에 척척 걸어가 등본을 떼어 본다. 그러면 자식이 사는 집의 문을 부서라 두드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장 큰 가해자는 부모야." 연진의 말은 더 정확했다. 뒷돈을 받고 자퇴원에 확인 서명을 한 것만으로는 모자랐나 보다. 십수 년 만에 아득바득 딸을 찾아가 결국엔 집을 화마에 휩싸이게 한다. 석재는 선아와 현남을 넝마가 되도록 패는 것도 모자라 노름으로 가정을 몰락시킨다.

그러니 <더 글로리>가 불변의 모·부성이나 강력한 혈연을 역설한다고 생각했다면 오독이다. 부모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동은은 연진의 비릿한 단언을 그대로 갚아준다. 살인마저 숨겨주던 연진의 어머니는 자신과 딸의 안위가 각각 저울 끝에 놓이자, 손쉽게 딸을 포기했다. 악인이라서 더 독할 것 같던 모성도 결국엔 허무하게 굴복했다. 어떤 모성은 완전무결하지 않다고, 이 드라마는 이의를 슬쩍 내민다.
 

<더 글로리> 11화 장면 ⓒ 장혜윤

 
혈연보다도 더 가족 같던 관계도 있었다. 동은의 가족은 하나뿐인 엄마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주변에 있던 좋은 어른이 식구가 되어주었다. 보건 선생님은 동은의 상처를 기민히 알아채고 증거를 남겨 도와줬다. 건물주 할머니는 강물이 차다며 봄의 따뜻한 날씨를 기다려보자고 약속했다. 사모님, 하며 건네는 삶은 계란에는 현남의 따끈한 애정이 함께 담겨있었다.

우리는 묻게 된다. 어머니와 모성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혈연은 또 무엇일까. 가족 등본에 쓰인 이가 인생을 후벼파고,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은 이가 후벼진 틈을 아득히 메꿔준다. 피는 지독하게 진해서 희석하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그래도 필요하다면 피는 끊을 수 있다. 어쩌면, 처음부터 피는 별 의미가 없었던 듯하다.

저마다 선택한 가족

예솔의 자그만 손을 잡고 출국 게이트로 향한 이는 결국 도영이었다. 차갑고 버석한 시멘트에 잠겨벼린 유전자 제공자는 끝내 가족이 되지 못한 채. "넌 친부 아니고 생부. (⋯) 친부는 하도영이야." 본인이 친부라며 노발대발하던 재준에게 변호사 친구가 단호하게 대답했던 것처럼 말이다.
  

<더 글로리> 15화 장면 ⓒ 넷플릭스

 
도영은 예솔의 옆에 서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핏줄이라 사랑스러운 자식인 줄 알았다. 더는 혈연이 아니란 걸 알았지만 하여튼 상관 없었다. 하예솔이니 전예솔이니 하는 형식적인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도 깨달았을 테다. 예솔이 그의 딸이 된 건 유전자 검사지에 적힌 몇 줄로 설명되는 일이 아니란 걸.

또 다른 장면, 영원한 잠으로 발을 내딛으려던 동은을 붙잡은 건 여정을 향한 생모의 모성이었다. 선아가 얼마를 받고 술집에서 일하나 묻다가 제 명에 치이고만 어리석은 누군가도 생부였다. 위험에 휩싸여가며 딸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려 한 꽃가라 원피스의 여인도, 우리가 잘 아는 생모였다.

그렇게 우리는 알 수 있다. 중요한 건 피 몇 방울이 아니다. 등본 서류 한 장에 같이 있다는 이유로 혈육을 백공천창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다. 배 아파 나은 자식이라서, 어떤 고통과 희생이라도 감내하는 사람도 있다. 무엇 하나 이어진 것이 없어도 전부를 다 내어주는 사람도 있다. <더 글로리>는 수 가지의 각기 다른 모·부성을 보여줬다.

드라마를 다 보고 난 뒤 난데 없이 어떤 포크송의 가사를 곱씹게 된다. '이건 뭔가 되게 크게 잘못된 것 같아'라고 가수 이랑은 노래한다. 당연한 줄 알았던 가족의 기준이 뭔가 잘못된 것만 같다는 반추다. 피라는 건 우리가 지금까지 크게 오해한 무엇이라고, 이랑도 <더 글로리>도 말해주는 것 같다.
 
내가 살고 싶은 그 집을 찾아서
내가 사랑할 그 사람을 찾아서
내가 되고 싶은 가족을 찾아서

나는 언젠가 후회하게 될까
오늘 엄마의 전활 받지 않은 것
내 평생 아빨 용서하지 않은 것
키우는 고양일 세게 때렸던 것

(…)

이건 뭔가 되게 크게 잘못된 것 같아

- 이랑, <가족을 찾아서> 중에서
더글로리 모성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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