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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순서에는 다 이유가 있거늘

급작스러운 기후변화에 혼란한 봄을 맞으며

등록 2023.03.24 16:46수정 2023.03.24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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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가르쳐주진 않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언제부턴가 봄꽃 피어나는 순서가 저장되어 있었다. 이른바 춘서(春序, 봄이 오는 순서). 봄이어서 꽃이 피는 게 아니라, 꽃이 피기에 봄이라는 법정 스님의 유명한 말처럼, 춘서에 따라 피어나는 꽃을 바라보며 봄이 서서히 곁으로 다가오는 걸 자연스레 느끼며 자라온 듯하다.


무작위로 배정받은 중학교는 집에서 거리가 아주 멀었다. 버스를 타고 시의 반대편 끝자락까지 가야 했다. 종점에 내려 좁고 긴 골목을 지나야 비로소 학교 정문이 나왔다. 그 좁고 긴 골목이 하나도 무섭지 않았던 건 함께 걷는 친구와 개나리 때문이었다. 그 골목에는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빈틈없이 개나리가 드리워져 있었다. 노란 개나리가 동시에 활짝 피어나 담벼락을 감싸면, 봄이라는 걸 '봄'으로써 절절히 체감했다.

교정에 들어서면 수십 년은 족히 되었을 아름드리 벚나무가 운동장 한쪽에 우거져 있었다. 개나리 다음은 벚꽃이었으니 하얗게 흩날리는 벚꽃 잎을 손바닥 안에 담아보려 친구들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지극히 여중생다운 봄을 맞곤 했다. 하얗고 찬란한 벚꽃 눈이 한창 내리고 나면, 비로소 철쭉의 계절이었다.

매화나 살구꽃, 산수유, 개나리 등이 다급하게 꽃망울을 툭툭 터뜨린다면, 철쭉은 짐짓 여유롭게 완연한 봄이 되어야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다. 철쭉이 피면 봄이 깊어졌다는 걸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부는 바람은 아무리 거세도 간지럽기만 했다.

봄이라고 해서 다 같은 봄이 아니었다. 춘서의 가장 앞에 놓인 매화가 피는 봄은 봄이라기엔 겨울의 향기가 더 짙은 계절이다. 대체 봄은 언제 오는 거냐며 시린 겨울을 견디고 견디다 어느 날 문득 발견하게 되는 게 매화다.

벌써 봄이 맞느냐며 의심을 하고 있으면, 봄은 정말 오고 있다고 속삭이듯 산수유가 피어난다. 살구꽃, 개나리, 진달래, 벚꽃, 철쭉... 꽃들은 자기가 피어날 시기가 언제인지 명확히 알고 있다는 듯 제때에 맞춰 피어났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꽃은 사실 지구상에 공룡보다도 늦게 등장했다. 초반에 등장한 공룡들은 꽃을 보지도 먹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이들과 공룡책을 들춰보다가 문득 최초로 꽃을 발견한 초식공룡의 얼굴을 떠올려본 적이 있다. 이렇게 아름답고 향기로운 무언가가 존재할 수 있다니, 하고 놀라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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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벚꽃 당초 예상보다 일찍 벚꽃이 피어났다. 현재 제주도에는 유채꽃과 벚꽃, 목련, 조팝나무꽃 등 수많은 봄꽃이 동시에 피어난 상태다. ⓒ 박순우

 
꽃이 지구에 나타나 길들인 건 벌이었다. 벌, 나비, 박쥐 등은 수분을 돕는 대신 꿀과 꽃가루를 얻어간다. 꽃이 시킨 건지, 벌이 스스로 선택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벌은 하루에 한 종류의 꽃만을 쫓아다닌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찾아간 꽃과 같은 꽃만 종일 찾아다닌다. 덕분에 꽃은 제대로 수분을 할 수 있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초봄에 피어나는 꽃들은 유독 그 크기가 작다. 앙증맞은 꽃들이 한데 모여 몽글몽글 꽃다발처럼 피어나는 게 이때 피어나는 봄꽃의 특징이다. 잎이 하나도 돋지 않은 나무에 꽃부터 다급하게 피어난다. 꽃들이 성급한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철쭉, 장미 등 크고 향기가 강한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자신들의 시간을 맞이하려는 것이다.

꽃이 한데 모여 피는 것도 더 강한 향을 함께 내기 위함이다. 벌이나 나비의 도움을 받아야 수분을 할 수 있는 꽃의 입장에서는, 더 강력하게 이들을 불러들이는 큰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빨리 수분을 마쳐야 할 것이다. 자칫 늦어지면 경쟁에서 밀려나기 때문이다. 식물 진화에 대한 책에서 이 부분을 보고 무척 놀랐다. 춘서에도 이유가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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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벚꽃 당초 예상보다 일찍 벚꽃이 피어났다. 현재 제주도에는 유채꽃과 벚꽃, 목련, 조팝나무꽃 등 수많은 봄꽃이 동시에 피어난 상태다. ⓒ 박순우

 
제멋대로 굴러가는 것만 같은 자연이 실은 촘촘하게 구성된 생명들의 향연이었던 것이다. 춘서의 비밀을 알고 나서는 작고 성급하지만 누구보다 빨리 우리에게 봄을 알려주는 초봄의 작은 꽃들에 더 마음이 갔다. 겨우내 죽은 듯 움츠리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저리도 예민하게 온도의 변화를 감지하다 마침내 제 시기가 되면 활짝 피어나는 것이었구나.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춘서가 헝클어지고 있다. 매화는 아직 자신의 때를 제대로 알고 꽃을 피우는 듯하지만, 그 뒤의 꽃들은 순서를 지키지 않고 저마다 빨리 꽃망울을 터뜨리겠다고 난리다. 급작스러운 기후변화에 꽃들도 적잖이 놀란 모양이다.

여왕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벌과 나비의 방문을 받으려면, 하루빨리 꽃을 틔워야 할 것이다. 그러니 산수유, 살구꽃, 개나리, 벚꽃에 조팝나무까지 두서를 모르고 정신없이 피어난다. 이 꽃이 피고 지면, 저 꽃이 피고 지고, 그렇게 하나둘 피고 지면서 비로소 완연한 봄날이 되었던 이전의 봄은 이제 여기 없다.

서서히 다가오던 봄이었는데, 두 손 꼭 모으고 오기를 간절히 바라던 봄이었는데. 그런 봄이 이제는 너무나 갑자기 찾아온다. 오랜 시간에 걸쳐 시나브로 진화하는 생명들에게 이처럼 갑작스러운 기후변화는 얼마나 당황스러운 일일까. 여기저기 혼란하게 피어나는 꽃들을 바라보며 자꾸 미안한 마음이 든다. 씁쓸한 봄날이다.
덧붙이는 글 브런치에도 게시합니다.
#제주도 #봄꽃 #벚꽃 #춘서 #기후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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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 『아직도 글쓰기를 망설이는 당신에게』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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