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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사 중건비에 새겨진 친일 행적... 굴곡진 근현대사

[산·책·글] 친일인명사전 등록된 이범익 강원도지사

등록 2023.03.25 20:29수정 2023.03.25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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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법흥사 중건비와 징효대사 탑비 법흥사 적멸보궁 들어가는 길목에 징효대사 탑비와 법흥사 중건비가 있다. ⓒ 이기원

 
5대 적멸보궁 중의 하나인 영월 법흥사에 가면 법흥사 중건비가 있다. 신라 하대 혼란기부터 시작해서 몇 차례 소실과 복원의 과정을 거쳐 1933년 중건하기까지의 과정을 알려주는 비석이다. 적멸보궁 법흥사의 유래와 역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으로 번역해보면 다음과 같다.
 
관동 영월 땅 사자산 법흥사는 신라 선덕여왕 왕족 자장율사가 창건하였고, 신라 말 난리에 불에 탔다. 원각스님은 속성이 천씨인대 어릴 때부터 불성이 있어 귀의한지 50년 되었는데 어느 날 꿈에 세 노인이 사자산 법흥사를 가리키며 말하길, "너는 이 산과 깊은 인연이 있다."

원각 스님이 기이하게 여겨 관무 경자년에 돌아다니며 수소문한 끝에 찾아, 머물 곳을 만들고 임인년(1902년)에 절을 성대하게 완성하였다. 법흥사 옛 이름으로 유지된 5년 병오년 6월 좋은 날에 한 노인이 수십 일 머무르다 철불 하나와 향로 하나를 주었는데 소홀히하여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임자년(1912년) 8월 17일 밤 불을 경계하지 못해 모든 절이 불에 타 철불은 녹아 형상 남고 향로도 다르지 않았다. 원각 스님이 그동안 쌓은 공덕이 사라져버릴까 걱정하며 반드시 다시 세울 것을 도모했다. 십수년 간 산을 깎고 숲을 확장하고 재물을 출연하며 힘써 도모했다.

불령이 성원을 받아들여 소화 5년 경자년(1930년), 임인년 당시의 모습을 되찾아 널리 알려 원각 스님의 숙원을 이루게 되었다. 원각 스님의 덕과 공을 흠모하던 많은 승려, 대중, 도제들이 중건비를 세우려 하였다.

불령은 승속으로 원각 스님의 족질이다. 내가 이곳에 오면 여러 날 머물렀는데, 불령이 내게 글을 청하였다. 나는 기뻐서 "원각 스님 같은 이는 '공에서 유를 보고, 유에서 공을 보는 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나는 감히 사양치 않고 글을 쓴다.

- 소화 8년 중추, 강원도지사 이범익 찬 -

 
 
법흥사 중건비 쓴 강원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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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사 중건비 1933년 법흥사 중건비가 세워지기까지 법흥사의 유래를 새긴 중건비 뒷면 ⓒ 이기원

  
중건비에 새겨진 글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소화 8년 중추'라는 대목이다. 소화는 일본제국주의 연호로 비문이 세워진 시기가 일제 강점기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서기로 환산해보면 1933년이다.

소화 연도 말고 눈길을 끄는 것이 비문 마지막에 새겨진 '강원도지사 이범익 찬'이란 글씨였다. 영월 법흥사 중건에 등장한 이범익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일제 강점기 강원도지사를 했으니 일제 식민지 통치에 적극 협력했던 인물이었을 거로 추측했다. 


그렇다고 해도 영월 법흥사 중건비에 이름을 새긴 것은 법흥사 또는 불교와 어떤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보았다. 혹시나 싶어 '친일인명사전'을 찾아보니, 짐작대로 이범익이 있었고 중건비가 세워졌던 1933년 강원도지사였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충북 단양에서 태어난 이범익은 관립 일어학교를 졸업한 후 러·일 전쟁 발발 당시 경성병참사령부, 한국주차군사령부 육군 통역으로 종군했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은사금을 받고 춘천, 금산, 달성, 예천, 칠곡 군수를 거쳐 강원도지사로 임명되었다.

간도 특설대 설치를 제안했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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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건비 후면 확대 중건비 비문을 쓴 인물과 세운 연도를 확인할 수 있다. ⓒ 이기원

  
이범익이 강원도지사로 근무하던 1930년대 경제 상황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조선 농민들에게도 밀어닥쳤다. 농산물 가격이 하락하면서 많은 농민이 몰락했다. 벼랑 끝으로 몰린 농민들은 지주들의 자의적 소작권 이동과 수탈 강화에 반대하며 소작쟁의가 확산되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총독부는 농촌 사회를 통제하고 지배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1932년 농촌 진흥 운동을 전개했다. 강원도지사로 근무하던 시기 이범익은 총독부의 정책에 적극 협력하는 것은 물론, 총독에 대한 충성을 앞세우며 아부도 서슴지 않았다.

"우가키 총독 각하의 열정으로 절규하는 농촌진흥, 자력갱생운동에 관민일치로 총력을 다해 협력"할 것을 강조하며 총독의 훈시가 "조선애에 불타는 주옥같은 명언"이라고 극찬했다.

총독부의 정책을 옹호하고 낯 뜨거운 아부와 헌사를 일삼았던 이범익은 1937년 만주국 전다오성(간도성)의 성장으로 임명되었고, 만주에서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938년 삼천리에 기고한 '간도에 와서'란 글을 통해 "불령분자 항일 비적들의 출몰을 대토벌과 귀순 공작에 의해 완전히 섬멸하고 일본 제국 신민으로서 임무에 충실"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나아가 간도 일대의 조선 항일부대를 섬멸하기 위해 만주군 내에 조선인으로 구성된 특수부대를 조직할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간도 특설대가 창설되었다. 간도 특설대는 1945년 일제의 패망까지 만주 일대 항일독립군 토벌에 동원되었다.

관립 일어학교를 졸업한 후 승승장구 친일의 길을 걸어간 이범익은 벼랑 끝으로 내몰린 농민들의 삶을 외면했고, 만주 일대의 독립운동가들을 노골적으로 적대시했다. 한 인물의 친일 행적이 단지 개인의 문제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범익의 행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적멸보궁 법흥사 중건비에 새겨진 이름에서 굴곡진 근현대사의 아픔이 되살아난다.
덧붙이는 글 제 계정의 페이스북에도 게재했습니다.
#법흥사 중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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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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