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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 전담 두어 달, 은퇴한 60대 살림남입니다

가족을 돌보는 마음으로 설거지를 하며 알게 된 것들

등록 2023.03.30 11:01수정 2023.03.30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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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하면 아무리 준비해도 현실은 또 다른 세계다. 새로운 기회도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내 경우 바깥에서의 새로운 모험과 도전도 중요하지만 집에서 할 수 있는 일부터 찾고 있다.


'설거지'를 내가 전담하기로 선언한 지 두어 달,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보람 있는 일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설거지를 통해 배우는 살림의 요령과 지혜도 적지 않다. 설거지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다.

설거지만으로도 '주방 살림'의 반은 터득한 것 같다. 집안 청소도 하나 둘 열심히 배우는 중이다. 이제 좀 실력을 쌓으면 냉장고, 세탁기 등 살림까지 그 범위를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설거지로 터득한 주방 살림

우선 설거지를 하면서 식습관이 많이 달라졌다. 다른 사람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설거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엔 식사를 마치면 자리 뜨기 바빴다. 아내가 설거지를 개수대에 잠시 모았다가 하는 이유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설거지에 잡념은 금물이다.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오물이 깨끗이 닦이지 않는다. 딴생각을 하면 그릇이 손에서 벗어나 여지없이 깨진다. 


설거지를 하면서 식기에도 관심이 생겼다. 설거지가 편한 용기를 찾게 되고 될수록 가벼운 재질을 선호하게 된다. 아내가 '손목엘보우'로 고생하는 것도 무거운 그릇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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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를 내가 전담하기로 선언한 지 두어 달,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 elements.envato

 
설거지 그릇 수를 줄여볼 궁리를 하다 '4각 접시'를 구입했다. 4개 반찬을 한 접시에 옹기종기 담을 수 있어 편리하다. 반찬 가짓수와 담는 그릇까지 챙기는 아내가 내 의견을 수용했다. 

4각 접시를 산 김에 가게를 한 바퀴 돌면서 '그릇 뚜껑'도 샀다. 뚜껑이 없거나 잔반 그릇 덮을 것이 필요했는데 마침 '실리콘 뚜껑'이 있었다. 용기 크기에 상관없이 밀폐력도 우수하다. 반토막 자른 수박도 이쁘게 덮어 보관할 수 있어 신기하다. 

달포 전에는 '주방 가위'를 교체했다. 설거지를 하다 가위 끝에 고무장갑이 그만 찢어졌다. 가위 끝이 날카롭지 않은 주방 가위를 다이소에서 득템 했다. 빨간색 주방가위는 사용하기도 편해 자꾸 손이 간다. 

설거지 마무리는 음식물 쓰레기를 담는 봉투 처리에 있다. 3명이 사는 우리 집 봉투는 2리터를 넘으면 곤란하다. 배출 음식쓰레기 양도 모르고 3리터 봉투를 샀다 애를 먹었다. 큰 봉투가 무조건 좋은 게 아니다. 

다이소와 생활용품 아웃렛에 자주 가는 편이다.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구경하는 것이 즐겁다. 살림에 필요한 것들 천지다. 과거에는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기다렸는데 이제는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어제는 '빨래건조대'를 하나 샀다. 4년 전에 산 이동 건조대를 몇 번이고 고쳐 썼는데 큰 맘 먹고 새 것을 구입했다. 고장날 것 없는 건조대도 때가 되면 가벼운 양말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는 법이다. 

사실 설거지를 하기 오래 전부터 빨래를 건조대에 널고 걷는 것은 내 몫이었다. 집안 돕는 것으로 맨 먼저 시작한 것이 빨래 말리기와 정리였다. 

물론 설거지도 아내가 여전히 돕고 있지만 내 중요한 일과로 자리 잡고 있다. 역할분담도 자연히 생겼다. 나는 밥을 짓고 설거지를, 아내는 국과 반찬을 도맡는다. 

은퇴 이후는 가족을 진정으로 돌보는 시간

주방 살림에 재미를 붙이며 진짜 배운 것은 따로 있다. 아무리 잘해도 아내가 바라는 대로 하면 제일 무난하다. 이는 현명한 며느리가 지독한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터득한 '살림 지혜'로 유명하다. 

'집안 살림'은 하루 이틀에 배우는 것이 아니다. 완벽한 것도 없다. 잔소리 하지 않는 미덕이 새삼 중요하다. 내가 설거지 하면 아내는 무조건 칭찬한다. 내가 지금까지 그런대로 버티는 원동력이다. 

많은 남자들이 바깥에서 평생 일한 것을 가족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기 급급한데 그것은 자만심에 불과하다. 역할은 언제든 바뀌는 법이다. 은퇴 이후야말로 따뜻한 밥을 함께 하며 가족을 진정 돌볼 시간이다. 

하릴없이 밖으로 떠도는 은퇴자들이 많다. 내 주변에도 돌파구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친구들이 있다. 나 또한 그런 시절이 있었다. 이들이 가정에서부터 인정받고 보람을 느끼도록 응원과 격려가 필요하다. 

'전업 남편'의 하루가 저문다. 오늘 저녁은 쓰레기를 배출하는 날이다. 빈 플라스틱 병을 따로 담아 집 앞에 가지런히 놓는다. 가족들이 편하다면 그것이 행복이며 내가 할 일이다. 
#설거지 #주방살림 #집안살림 #은퇴자 #전업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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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메모와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기존 언론과 다른 오마이뉴스를 통해 새로운 시각과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주요 관심사는 남북한 이산가족과 탈북민 등 사회적 약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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