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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와 아이들'의 무대가 그리운 이들에게

[명반, 다시 읽기] 서태지와 아이들 1집 'Seotaiji And Boys'(1992)

23.04.02 18:20최종업데이트23.04.02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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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레트로 열풍에 발맞춰 1990년대 대중가요가 다시금 조명받고 있습니다. 장르 및 시대를 아우르는 과거 명반을 현재 시각에서 재해석하며 오늘날 명반이 가지는 의의를 되짚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서태지와 아이들 1집 < Seotaiji And Boys > 앨범 커버 이미지 ⓒ 반도음반

 
'아이콘'이라는 칭호를 얻기 위해서는 다수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런지(Grunge)를 메인스트림으로 옮겨 얼터너티브 록의 부흥을 이끌었던 커트 코베인이 그러했고, 압도적인 음악성과 퍼포먼스, 파격적인 뮤직비디오로 충격을 주며 팝 음악의 판도를 뒤집은 마이클 잭슨이 그러했다.

국내 가요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미친 영향력은 앞서 나열한 이름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 단순히 상업적 과업뿐만 아니라 현재 K팝 컴백 시스템을 확립하며 문화에 미친 파급, 시대를 앞서간 패션 스타일은 그들 앞에 붙는 1990년대 젊음의 아이콘이라는 수식어를 정당한 타이틀로 만든다. 

그중에서도 국내 힙합 신에 미친 영향력은 거대하다. 한국어 랩의 역사를 훑었을 때 '김삿갓'을 노래한 홍서범, '슬픈 마네킹'의 현진영 등이 먼저 놓이긴 하지만 힙합 문화를 매스미디어로 가져온 아티스트가 누구냐 묻는다면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대답에 반기를 들기는 힘들다.

한국 최초의 맙(Mob)
 
갱스터 문화를 힙합에 대입한 맙(Mob)은 '무리'를 뜻하는 은어로 조금 더 어감을 살려 번역하면 '떼거리'이다. 미국 대중음악에서는 1970년대 후반부터 그룹 이름에 '갱(Gang)'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더 슈가힐 갱(The Sugarhill Gang)이 성과를 내기 시작했고 1980년대에 본격적으로 런 디엠씨(Run DMC), 비스티 보이즈(Beastie Boys), 앤더블유에이(N.W.A) 등이 맙으로서 활동했다. 힙합 르네상스에 박차를 가한 1990년대에 이르러 우탱클랜(Wu-Tang Clan)의 영향력이 불어나 크루(Crew)라 불리는 '떼거리' 문화는 전 세계 어디를 가도 힙합과 뗄 수 없는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적어도 대중적인 한국 최초의 맙은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옷 입는 스타일을 통일하고 젊음을 표방해 하나의 목소리를 이끌어냈으며 무엇보다 대다수가 랩으로 동의할 수 있는 사운드를 양지로 이끌었다. 많은 음절을 리듬에 맞춰 나열하는 데에 그쳤던 홍서범이나 현진영에 비하면 서태지는 랩에 대한 높은 이해도로 작법을 구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랑을 한다는 말을 못 했어/ 어쨌거나 지금은 너무 늦어 버렸어/ 그때 나는 무얼 하고 있었나/ 그 미소는 너무 아름다웠어."
"그 미소/ 그 눈물/ 그 알 수 없는 마음/ 그대 마음/ 그리고 또 마음/ 그대 마음."
-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중에서.


어미를 맞추거나 같은 단어를 배치하는 정도지만 유사한 발음을 통해 리듬감을 살리는 라임(Rhyme)에 대한 이해가 가사에 선명하게 나타난다.
 
소위 비보잉이라 부르는 브레이킹 댄스를 본격적으로 무대 위에 올린 선구자이기도 하다. 서태지는 랩을 적절하게 꾸며줄 수 있는 춤을 찾았고 당시 언더그라운드가 활성화되어 있던 비보잉 신에서 이주노와 양현석을 발굴해 냈다. 3명이 손을 잡아 팀을 이루면서 랩, 패션, 비보잉을 제대로 구사하는 맙이 탄생한 것이다.

힙합적 상징성
 

서울 잠실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서태지와 아이들 3집 발매 기념 콘서트. 1994.8.13 ⓒ 연합뉴스

 
대중음악가로서 서태지의 뿌리는 대한민국 최초 메탈밴드 시나위에 있다. 베이시스트로 첫발을 내디딘 역사 덕에 그룹으로서 남긴 네 장의 정규음반에는 블루스, 알앤비, 록 등 다양한 장르가 혼재되어 있다. 엄밀히 말하면 온전히 '힙합'으로 분류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음에도 이들이 한국 힙합에 있어서 상징성을 갖는 이유에는 음악 안에 반항적이고 도전적인 10, 20대의 저항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1982년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앤 퓨리어스 파이브(Grandmaster Flash & Furious Five)가 'The message'를 통해 빈민가의 삶을 고발한 것을 시작으로 사회 의식의 메시지를 담은 컨셔스(Conscious) 랩은 힙합의 한 문화로 정착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92년의 서태지는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 이를 과감히 도입했다. 종종 연가로 오해받는 1집의 '환상 속의 그대'는 '시대 유감', '교실 이데아', '컴백 홈'에 앞서 그 파격적 시도 첫머리에 오르는 곡이다.

"사람들은 그대의 머리 위로 뛰어다니고/ 그대는 방 한구석에 앉아/ 쉽게 인생을 얘기하려 한다."
- 서태지와 아이들 '환상 속의 그대' 중에서. 


이후 한국 래퍼들은 언더그라운드와 메인스트림을 가리지 않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멋을 따라잡으려 노력했다. 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가사를 썼고 스타일을 따라 했으며 방탄소년단이나 빅뱅 등 힙합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후배 아티스트들은 직접 그들의 음악을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과거 그들의 무대와 음악을 재조명하는 이유이다.

국내외 유수의 매체가 서태지와 아이들의 결성과 해체를 K팝 역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뽑는다. 한국 팝 시장의 성장과 함께 영향력이 범세계로 커지면서 현재 시스템의 기반을 만들어낸 서태지의 공을 높이 사는 것이다. 전 세계로 뻗어나갈 준비를 마친 한국 힙합 약 30년의 역사에 있어서 그들이 만들어낸 변곡점은 대중음악사에 꼭 기록되어야 할 지점이다.

 
명반다시읽기 서태지
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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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음악 좋아하고 영화도 애정하는 편입니다. 좋은 글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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